길지 않은 분량 안에 여러 가지 생각 거리를 완벽하게 녹여낸 단편입니다.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아우르면서도 끝끝내 초점을 잃지 않은 점이 놀라웠어요. 이 이야기 속에서는 사랑과 성,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정체성, 그리고 삶의 의미가 모두 하나의 실로 꿰어집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독자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특히 여성이란 무엇인지 내내 고민하게 되지요.
‘혜진’과 ‘리아’는 처음부터 자매로 등장합니다.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매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무언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죠. 제 경우에 그 짐작은 절반 정도만 맞았어요. 저는 혜진과 리아가 혈연으로 맺어진 자매 관계에서 어떤 계기로 이탈했다가 극적으로 귀환하는 구조의 전개를 예상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거든요. 독자에 따라선 저와 아주 다르게 짐작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아요.
도입부에 투닥거리며 등장하는 혜진과 리아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현실 자매’라고 무심하게 부르는 틀에 얼추 들어맞는 듯 보입니다. 리아는 언니의 수수한 옷차림을 거침없이 지적하고, 혜진은 얄미운 동생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서죠. 자매는 떨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혜진은 대학 도서관에 도착해서도 리아의 지적이 신경 쓰이고, 리아는 자신의 서랍 속에 섞여 있는 혜진의 싸구려 브래지어가 눈에 밟힙니다. 이렇듯 자매는 성격부터 취향까지 모든 게 정반대인 듯하지만, 자매라는 게 원래 그런 줄만 아는 독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겠죠. 하지만 상황은 곧 달라집니다.
이질감은 리아에게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됩니다. 편지를 뜯어 내용을 살펴본 리아는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짧게 고민하고는 곧바로 행동에 나섭니다. 그러는 동안 혜진에게는 전혀 다른 드라마가 펼쳐지지요.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여학생에게 길 안내를 해준 혜진은 조금씩 그 여학생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몇 번의 대화에서 확인된 여학생의 신념을 따라 혜진은 자신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주기 시작합니다. 브래지어를 푼 것도 그중 하나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외출하고 돌아와 오랜만에 리아와 마주친 날, 자매는 크게 다툽니다. 이 다툼에는 혜진과 리아의 내면에 응집된 여성과 자아, 그리고 관계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격렬한 갈등과 충돌은 이들이 다시금 자매로 탄생하기 이전에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이 이야기에서 브래지어는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보여요. 이 브래지어를 인물이, 그리고 독자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작품을 수용하는 방식도 결정적으로 달라질 것 같습니다. 브래지어를 입는 것과 입지 않는 것, 둘 중 무엇이 일그러진 시선의 권력에 순순히 길들여지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는 길일까요. 물론 이야기는 맹목적인 이분법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 이분법이야말로 어쩌면 시선의 권력에 통째로 함몰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양자택일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삶에는 쉽고 빠른 길보다 불편하고 지난한 길을 택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지요. 결국 옳은 삶이란 그런 치열하고 혼란스러운 고민의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