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동물원에서나 호랑이를 실제로 볼 수 있지만,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엄청난 수의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부터 철종까지 500여 년 간 호랑이는 937회 나타났고 피해자는 3,989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때는 개체수가 너무 많아서 오늘날의 자동차만큼이나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호랑이는 어쩌다 순식간에 우리들의 주변에서 자취를 감췄을까. <짐승 사냥>은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소설이다.
15년 경력의 사냥꾼 ‘나’는 어느 마을의 영주로부터 호랑이를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곳으로 향한다. 깊은 밤 산속에서 늑대떼에게 습격을 당하는 위험을 불사해가며 도착한 마을은 빈궁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유하고 풍족한 곳이었다. 영주의 저택에서 영주를 만난 ‘나’는 얼마 전 마을에 호랑이들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말을 듣는다. 희생자 중에는 영주의 딸도 포함되어 있어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는 영주의 의지가 보통이 아니다. 이미 여러 번 호랑이를 잡은 경험이 있는 ‘나’는 장비나 병력을 지원해주겠다는 영주의 제안도 거절하고 호기롭게 혼자 몸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나선다.
소설 초반에 ‘나’가 산속에서 마주친 늑대떼와 싸우는 장면이 상당히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 또한 ‘나’가 목표물인 호랑이를 추적하고 포획하고 사냥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의 말을 하는 호랑이가 등장하고, 그 호랑이와 ‘나’가 진지한 태도로 문답을 하는 내용이 전개되는 것을 보며,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사냥꾼이 호랑이라는 짐승을 사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 아니라 호랑이로 상징되는 전통/동양의 문명이 쇠퇴하고 영주로 상징되는 현대/서양의 문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을 그린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단서는 작품 곳곳에 있다. 소설 초반에 ‘나’는 담배는 좋아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궐련 담배는 좋아하지 않고, 풍요는 좋아하지만 끊임없이 물건들을 ‘배설’하는 공장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령을 익히기 위해서는 숙련이 필요하다’고 믿는 그로서는 뭐든 쉽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현대/서양의 문명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르다. 서방 문명에 개방적인 영주 덕분에 마을에 공장이 생기면서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이들은, 외부인이 영주의 험담을 하는 걸 싫어하고 그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영주를 칭송한다. 이것이 영주 개인의 인품이나 능력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가져다준(사실은 마을 사람들 스스로 노동해서 얻은 결과인) 풍요에 대한 찬사임은 두말할 필요 없다.
마을에서 ‘사라지지 않은 옛것’으로는 시장 중앙에 위치한 조각상이 유일한데,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통행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재료가 석회석이라서 재활용할 가치도 없다는 게 모순적이게도 이 조각상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다. 이런 마을에선 혹시라도 석회가 희토류만큼 희귀하고 값비싼 자원이 되면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바로 조각상을 파괴할 것이다. 우두머리 호랑이가 죽고 뒤에 남은 호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것을 돈으로 따지는 영주라면 산 근처에 동물원을 짓고 남은 호랑이들을 가두고는 돈벌이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런 곳이라면 결국 인간들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텐데…
풍속학자는 말한다.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건 ‘과거에 얽매여 현재에 염증을 느끼는 괴짜들’뿐이라고. 그렇다면 언젠가 현재에 염증을 느낀 마을 사람들이 과거의 것을 찾는 날이 올까. 그때는 호랑이도 없고 호랑이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을 텐데, 무엇으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을 추억할까. 눈 앞의 이익 때문에 과거를 지우는 사람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