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은 인공 배아로 만들어진 아이와 한 아이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친구인 김유미는 나에게 자신은 19살까지 밖에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너에게 김이수는 그런 슬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며, 슬퍼하는 자신만 이상해졌다고 쏘아 붙이고는 도망치듯 떠난다. 그렇게 김유미의 전화를 기다리며 주말을 보내던 김이수는 처음 보는 낯선 전화를 받게 된다. 그 전화는 이곳에서 본 것과 들은 것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라고 하며 김이수를 어떤 연구소로 데려간다.
그 곳에서 김이수는 김유미는 사실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유미의 이름이 사실 도미라였던 것도 밝혀진다. 이름이 바뀌게 된 경위를 묻는 연구원에게 김이수는, 떨어져있던 김유미라고 적힌 이름표를 주워 건넨 것이 계기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둘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다. 김이수는 김유미에게 너의 기억은 자신이 기억하니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김유미는 김이수에게, 내 몫까지 슬퍼하는 네가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누군가의 기억은 그 누군가로 말미암아 추억이 된다.
오래토록 새겨진 기억은 그 사람에게 남아 이정표가 되어준다. 아마도 그의 모든 것이 남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김이수에게 그 것은 김유미와의 추억이다. 처음으로 땅에 떨어진 김유미라는 이름표를 주워준 것부터,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같은 반이 된 것까지 모든 게 소중하다. 그렇게 김유미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의 추억은 죽음이라는 이별로 마무리된다. 그 것은 갱신되지 않을 누군가의 기억을 짊어지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고, 언젠가는 잊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짊어지는 것을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그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진다.
그렇게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기억을 짊어져야하는 자는 그 무게로 인해 슬퍼한다. 기억을 짊어지는 것은 단순히 그와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든 것을 짊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시’ 만남으로써 갱신한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와의 소중한 무언가를 하나씩 알아간다. 그러나 갱신되지 않는 기억은 ‘자신’으로 물들어간다. 그 과정 속에서도 온전히 그를 지켜내야함을 알기에 그 무게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김이수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라는 고백은, 그 무거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남아있는 자를 상기시킨다. 기억은 데이터로 보관되어 남을 것이고, 너의 존재는 내가 남아서 기다릴 것이다.
떠나갈 자는 자신이 남겨질 것을 알기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그에게 물들어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하나가 되는 일이다. 기억은 그렇게 서로 서로 얽혀가며 하나가 된다. 이 소설에서 그 것이 더욱 값진 것은,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김유미의 태생 때문이다. 과학으로 태어나, 과학에 의해 자라온 그녀는 도미라라는 이름을 가진 채 실험 대상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김유미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도미라가 아닌, 김이수의 김유미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게 될 그녀가 온전한 생을 살고자 하는 의지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미라클을 바라는 이유는 서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슬퍼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면면은 대조적이다. 그마저도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김이수에게 그 ‘다름’은 슬픔이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아쉬움이다. 그리고 일상의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음이 갑작스레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것에 ‘첫 번째’라고 호명한 것은 다음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SF가 시작된다. ‘너’를 찾기 위한 과학의 다음을 아마 김이수는 찾아내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렇게 첫 번째 이별이기에,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