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눈의 여왕>은 언어폭력을 겪는 아이가 상상 속의 존재를 통해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은수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고 어머니가 눈의 여왕이라고 믿게 된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얼음과 같은 말들이 나와 주인공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말에 심장을 보호하는 상상을 하며 최대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시림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어느 날, 그런 주인공 앞에 아로라는 초록색 난쟁이가 나타난다. 그는 눈의 여왕의 자녀는 눈의 여왕이 되고 만다며, 그 전에 자신과 함께 마법을 훈련하여 자신을 보호하자고 제안한다. 말과 상상력으로 마법을 부리기 위해 첫 번째로는 심장을 막아주는 방패를 그려 붙이고 어머니가 공격할 때 그 것을 상상할 것을, 두 번째로는 심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칭찬할 것을, 세 번째로는 봄과 불의 말을 다루기 위해 어머니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을 적을 것을, 마지막으로 그 말들을 어머니에게 선언할 것을 제언한다.
주인공인 은수는 그 것을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러자 시원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어머니는 언어폭력을 멈추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초록색 난쟁이 ‘아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소설에서는 아이이기에 겪을 일들과 아이가 겪게 될 일들이 교차한다.
주인공인 은수는 11살이나 되었고, 가족의 객관적인 상황과, 엄마의 언어폭력에도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하는 캐릭터이다. 이 지점에서 상상 속의 존재라는 키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상상 친구와 모험 하는 이야기를 많이 접해왔다. 조금 먼 이야기로 김이환 작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이 소설에서는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 판타지 세계를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눈의 여왕>은 판타지 소설이나 지극히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상상 친구는 망상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존재인 초록색 난쟁이 ‘아로’는 그저 망상이라고 치부해야 할 까. 그러나 은수는 망상으로의 도피로 자신을 보호하는 인물이 아니다. 물과 봄의 말로 어른의 세계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아이다운 상상력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인물로 봐야한다. 이 지점에서 아이가 겪을 일들과 아이가 겪게 될 일들이 교차한다.
이것은 세계를 대조된 두 영역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이 두 세계의 화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것은 아이라는 입장은 부모의 도움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존재기에 위계가 형성되어 그렇다. 한 쪽은 화해를 원하지만 한 쪽은 화해할 수 없는 (가해를 멈출 수 없는) 상황은 불평등한 위계에 의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낮은 위계의 사람이 높은 위계의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아로’의 훈련은 그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단 엄마의 잘못 뿐일까.
‘엄마도 자기 엄마한테 계속 차가운 말로 공격을 받아 눈의 여왕이 된 거겠지?’
그 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에게 건네는 최초의 연민이다. 지금껏 종속된 위계에서 최초로 자신과 동등한 입장으로 바라본 시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마치 전염되는 것처럼 차가운 말로 대와 대를 이어온 결과물을 자신의 손으로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것이 동화라는 표현을 빌려 낭만적으로 표현되지만, 지극히 차가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주인공인 은수를 친구도 없이, 엄마의 모진 말에 놓이도록 만든 것일까. 그 것이 과연 엄마만의 잘못일까. 이 소설은 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그 근본적인 해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 것은 이 소설이 방만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적으로 아이의 잘못이 아니기에, 아이의 시선으로는 그 곳까지 닿아선 안 된다. 소설과 함께한 후, 현실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개인의 시선으로도 그 답을 내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작 중 은수의 가족은 한부모 가정으로 보인다. 한부모 가정이 정상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부족함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홀로 남은 엄마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어렵게 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정녕 아이와 아내를 두고 먼저 가버린 아빠의 탓을 해야 할까.
아마도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어느 쪽도 책임이 있고, 어느 쪽도 경감될 변명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변명은 변명일 뿐이다. 변명에 멈춰서는 안된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판타지는 판타지기에 아름답다.
만약 어떤 아이가 이 과정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아동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온 사람으로써는, 그리고 그 아동폭력을 겪은 사람으로써는 조금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 때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그때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의 아로의 조력이, 은수의 용기가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판타지는 판타지기에 아름답다. 그 것은 아름다움의 관망이 아닌, 사회가 아름다움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신념에 대한 아름다움이다. 만약 관망의 아름다움이라고 치부한다면, 이 사회에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에 대한 무시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널리 퍼졌으면 한다. 우리 모두 아름다움을 목도하고 그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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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여담입니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최근 들어 슬럼프가 와서 글을 거의 못썼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러네요.
늘 상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아무쪼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