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기록된 이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거래했던 사례는 그리 드물지 않다. 그건 곧 인간의 존재 양식과 그 의미를 도구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당대의 윤리규범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이나. 이는 분명 보편 인권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현대 국가의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분제에 귀속되어 있었던 근대 이전의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동일선 상에서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성에 대해 먼저 고민해보아야 한다. 현재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명제가 성립 가능하다면, 지금의 우리 역시 인간성이라는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놓인 미완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전의 인간과 지금의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 있을까. 우리는 지금 얼마나 인간이고, 미래에 얼마나 더 인간적으로 변해갈 수 있을까. 「리시안셔스」는 바로 그 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끝 같은 작품이다.
「리시안셔스」에서 존재 양식은 ‘인간’과 ‘미등록’으로 차갑게 양분된다. 둘은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서 독자의 눈에는 같은 인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 속 세계관에서 ‘등록’되지 않은 삶들은 인간으로 명명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려면, 단지 같은 종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향상된 인공 신체를 가지고 150년 간 ‘요새’ 안에서 인류 차원의 계획을 위해 복무할 자격을 갖춘 자로 등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리시안셔스」의 독자는 낯선 미래 속에서 새롭게 규정된 인간의 정의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당연히 이곳에서 통용되는 법과 윤리는 현실의 그것과 같지 않다. 인간과 미등록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요새는 둘 사이를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구분 짓는 가시화된 장벽이다. 인간과 미등록은 모두 자신의 의지로 생명을 자가 종료할 수 있는데, 누릴 수 있는 평균 수명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 요새 안의 인간은 150년을 살지만 요새 밖 미등록의 평균 수명은 고작 22년 남짓이다. 그런 미등록이 운 좋게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는 ‘공생인’이다. 작중에서는 ‘A11’이라는 이름의 공생인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공생인의 역할은 요새 안에서 인간을 위한 잡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등록이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위가 바로 주인공 ‘진’에게 허락되는 ‘반려인’이다. 반려인의 존재 의미는 현실의 반려동물과 같다.
미등록이 공생인이나 반려인이 되어 요새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로 거듭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주어진 열악한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시안셔스」는 누군가의 기본권이 타인의 선의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현상을 의도적으로 구축해낸다. 다시 말해 공생인과 반려인이 갖게 되는 추가 수명은 인간이 지닌 선의의 유효 기간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공생인과 반려인의 쓸모가 완전히 다르다는 데에 있다. 공생인은 반드시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반려인은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에서 인간 ‘규희’가 반려인 ‘진’을 대하는 태도는 현실 속 인간이 제 반려동물을 대하는 모습에 그대로 포개어진다. 그렇다면 주인과 대가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또는 그렇다고 간주되는― 반려인의 시점에서 쓰인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인간과 반려동물이 공존하는 현실의 은유로 접어든다.
규희는 현대의 인간 군상을 폭넓게 아우르는 상징적 인물이다. (실은 이 이야기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세 인물 모두가 상징적이다.) 인간은 다른 종에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능력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학대와 착취를 일삼는 종차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규희는 인간의 그러한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야기의 중반까지 규희는 오갈 데 없는 한 반려인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선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차츰 드러나는 진실은 그의 선함이 거의 전적으로 인간 중심적 사고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규희를 포함한 이 세계의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진정성 있게 답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해 보인다.
‘만약 당신의 소중한 반려인이 당신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편 미등록 출신인 A11과 진은 규희와는 다른 종을 상징한다. A11은 인간에게 편익을 제공할 의무를 짊어진 종을 대변한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경제동물’이라는 개념에 가장 가깝게 닿는 인물이다. 그리고 진은 표면적으론 인간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는 종을 대변한다. 역시 점점 쓰이지 않는 ‘애완동물’의 개념에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이야기가 택한 구도에 따르면 공생인은 착취당하는 동물이고, 반려인은 사랑스럽기만 하면 되는 동물이다. 충분히 사랑스럽지 못하거나 나이 들어 주인에게 외면받은 동물은 종종 파양되곤 한다.
규희의 민낯을 경험한 A11은 인간에게 종속된 삶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 분투한다. 반면 진의 싸움은 좀 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다. 진은 규희와 의심 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고 그 너머의 현실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규희는 인간이 정해놓은 시스템 안에서 둘을 끝까지 통제하려 한다. 결국 이 안에서 가장 폭발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장면은 세 인물이 서로 다른 목표 지점을 향해 달리다 충돌하는 결말부에 나타난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구도의 삼각관계이다.
「리시안셔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점은 인물에게 이름이 주어지는 과정이다. ‘진’은 그가 내내 이름 없이 살아오다가 생명을 자가 종료하기 위해 요새에 온 날 임시로 지급받은 이름이다. 즉, 호명의 객체로서만 의미를 갖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란 단순히 타인에게 불리는 용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증명하듯 이야기 속에는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인물 ‘A11’이 등장하는데 그에게 각각의 이름이 주어지는 과정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A11’은 공생인의 관할 구역과 숫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고, ‘다은’은 ‘진’처럼 요새에 들어온 첫날 임시로 지급받은 이름이다. 그리고 ‘해인’은 바로 그 자신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이 세 개의 이름은 그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부여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며 분투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상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결국 어딘가에서 ‘해인’으로 불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인간성’을 생득적 지위로 보유한 규희와 투쟁으로 획득하려 했던 해인, 그리고 오래 전의 인간들이 그랬듯 대가 없는 애정으로 파악했던 진까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명제가 성립 가능하다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는 정말 누구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얼마나 인간일까. 이야기는 인간의 여러 가지 존재 양식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물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SF가 정말로 의미 있고 따뜻하게 존재하는 양식의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