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이라는 건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갈치를 잡지 못 하는 상황이죠. 나이를 꽤나 먹었다고 생각하는 한 메마른 마초는 중년이 되어서도 방황 중이니 방황에 어울리는 나이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청소년기와 이십 대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방황의 시기를 잠깐이라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 예은 또한 큰 아픔을 겪은 후 길을 잃고 해메게 됩니다. 속을 잘 보이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고민을 가지고 들어가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새로운 만남을 겪으면서 친구를 잃고 상처 받았던 그녀는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쓰고 보니 ‘자연스럽다’라는 게 뭘까 되새겨보게 됩니다. 예은이 겪은 상실은 분명 일반적이지 않은 충격이죠. 그녀는 친구가 느꼈을 아픔에 공감하면서 자신 또한 떨어지는 걸 상상합니다. 이십대는 세상이 주는 자극을 어느 때보다 크게 받아들일 때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이 섬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더군요.
다시 자연스럽다는 것에 대해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서 특히나 좋았던 부분이 바로 자연스러움입니다. 친구의 죽음은 모두에게 상처가 되었지만, 예은의 친구들은 예은에 비해서는 아픔을 잘 이겨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상처와 그에 따른 고통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 벌써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예은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은 예은에게 ‘우리도 견디는데 너는 왜 못 해’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리를 지켜줍니다. 함께 하던 음악을 계속 하고 새로운 멤버를 받아들이죠. 불안하게 비틀거리는 예은이 높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은 예은을 붙잡는 대신 그녀 곁에 서 있는 걸 선택합니다.
예은이 왜 자신이 떨어질 곳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선택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올라가거나 내려가기 위해서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되죠. 예은은 사랑했던 친구를 보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신과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는 세상이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렇듯 예은도 에스컬레이터를 다 오르고 언젠가는 스스로 걷게 될 겁니다. 먼저 떠난 재희와 닮은 구석이 있는 소라의 등장이 예은의 마음에 변화를 준 건 사실이지만 소라가 없었다 해도 결국 예은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랐을 것 같습니다. 조금 비틀거리고 힘들어하겠지만 그녀의 곁에는 든든한 방호망이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큰 상처를 입었던 사람이 아주 천천히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재미있는 단편입니다. 탁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유리 잔을 보는 것 같은 주인공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고, 무엇보다 작가님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저에겐 너무 좋더군요.
인위적인 부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내가 알고 지냈던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는 것 같은 이야기의 담백함도 좋고 그럴 리 없지만 예전에 저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풋풋한 감정들이 아른아른 거려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번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떤 때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처럼 자연스럽게 치유된 것 같지만, 사실 곁에서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봐 준 누군가가 있었을 거란 걸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느끼게 되네요.
가슴 한 편이 저릿하면서도 완독 후엔 기분이 푸근해지는 단편소설 ‘추락방호망’은 특히나 요즘처럼 마음이 답답해지는 연말에 읽기 좋은 재미있는 글이라 생각되어 독자 여러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