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황제가 된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꽃의 낙인, 화인 (작가: 남그꼼, 작품정보)
리뷰어: 브리엔, 21년 12월, 조회 78

옛 시대가 배경인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볼 때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한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에게는 입신양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거나 남다른 야망을 품은 여성 캐릭터가 나와도 (남자였다면 일국의 왕이나 장군 정도는 되었을 텐데 여성이라서) 잘 되어봤자 누구의 아내 또는 어머니가 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늘 못마땅했다. 

 

남그꼼 작가의 <꽃의 낙인, 화인>은 옛 시대가 배경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한정적이지 않아서 만족스럽게 읽은 작품이다. 여성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장군도 되고 왕도 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여자들이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만나면 일단 힘 겨루기부터 하는 모습이라든가, 대의를 목적으로 인재를 모으는 모습이라든가, 과거의 남성들처럼 성년에 이르면 관례를 치르고, 여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일 없이 가문의 대표로서 가업을 잇는 모습 등이 너무나 속시원하고 유쾌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가상의 나라인 ‘하제국’. 어지러운 천하를 평정하고 하제국을 세운 선황제(영울제)에 이어 황위를 이어받은 안평제가 주인공 ‘제갈림(영녕군주)’의 고모다. 제갈림은 황위 경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사는 아버지처럼 자신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왕부에서 서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실 종친들이 모이는 연회장에서 우연히 대장군 가문의 딸 ‘서융롱’과 만나면서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여겼던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초반에는 동양풍 로맨스의 분위기가 강하지만 점차 추리물, 나아가서는 정치물의 성격이 강해진다. 융롱을 따라 수도로 내려온 제갈림은 화약을 암거래하는 현장에 잠입하기도 하고, 화약이 흐르는 경로를 뒤쫓다가 제국 변방의 실상을 목격하기도 하고, 실종된 태자비를 찾다가 차기 황위를 둘러싼 어두운 음모를 엿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제갈림은 황제의 아들딸인 태자, 소양공주, 3황녀 등은 물론이고 황제로부터도 견제를 받으며 장차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될 것을 예상케 한다.

 

다채로운 성격을 지녔지만,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운명과 선택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초야에 있을 때 제갈림은 “굳이 천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통치자가 도를 다해야 할 곳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융롱을 만나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융롱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 백성들을 구하고 나라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치자(治者)’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제갈림은 원래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므로 정해진 운명에 따라 이러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제국은 여성의 지위가 높으니 여성과 여성이 결합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내가 그랬다). 하지만 하제국이 아무리 여성의 지위가 높아도 ‘이성 간 결혼이 보편적’이라는 문장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성 간” 결혼이 보편적인 세계라면 여성과 여성의 결합은 보기 드문 사례라는 뜻이다. (이성 간) “결혼”이 보편적인 세계라면 현재로서는 비혼인 제갈림과 서융롱도 언젠가는 남성과 혼인해 자녀를 출산할 부담을 지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제갈림과 서융롱이 수호의 화인을 맺은 것이나 각각 정치에 발을 들이고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이 그저 수동적으로 본능을 따르거나 운명에 순응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회적으로 결혼이 보편적인 관습이고 그 형태가 정해져 있는 한 (황제가 되지 않는 한) 여자라면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이 늘 이들을 따라다닐 테니 말이다. 여자가 황제도 될 수 있고 장군도 될 수 있는 세상인데, 여자와 결혼하거나 결혼을 안 하면 소수자라니. 영녕 군주, 부디 이렇게 된 이상 황제가 되시길!!

 

정해진 대로 살지 아니면 살고 싶은 대로 살지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은 <태자비를 찾아라>에 등장하는 양예진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라는 물음에 도리질치던 예진이 결국 자신의 내밀한 소망을 내비쳤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예진에게 그런 물음을 거듭해서 했을 정도면 융롱 자신도 그런 물음을 품었던 때가 있는 걸까. 융롱의 과거를 상상해보게 된다.

 

이 밖에도 단선이나 해연, 이설은처럼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온다. 이 아름답고 통쾌한 이야기를 아직 더 읽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지. 한해의 끝자락에 만난 선물 같은 이 소설이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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