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괴물과 괴물의 일상 공모(비평)

대상작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작가: 엄성용,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21년 11월, 조회 39

리뷰를 쓰려다 보니, 문득 트릭과 반전은 구별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개 추리소설 외의 장르에서 트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드러내는 장치라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지는 점이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야기에 대한 주의를 유지하고 독자의 멱살을 끌고가기 위해 파묻어 놓는 모종의 함정인데, 보물찾기나 직소퍼즐처럼 사람은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성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스포일러가 숨겨져 있습니다.

 

화자의 독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화자는 우리-라지만 술 마시는 성인인 독자들-에게 몹시 익숙한 상황속으로 손을 잡아 끕니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황이지요. 그리고 그 기억을 재구성하는 느낌으로 어젯밤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줍니다. 연중 한 두 번 정도는 아침에 일어나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야 하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파트에서 약간 불길한 점은, 화자가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점입니다. 술 먹다가 자기 혼자 산책 나간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그럼 그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곧 알게됩니다.

근처 아파트로 산책을 나간 화자는 우연히 범죄현장을 목격하고, 범죄인에게 목격당합니다.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도입부에서 자주 보이는 상황인데, 그만큼 대중에게 소구하는 바가 큰 상황이라는 뜻이겠지요. 어차피 우리는 대개 범죄의 주체나 객체가 아니라 목격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제 표적은 화자가 되고, 그 추격전이 이 어젯밤 이야기의 절정을 이룹니다. 이미 일을 저지르고 흉기까지 소지한 추격자에게 잡히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쫓기는 쪽의 입장이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되면서 그 절체절명절박한 심경을 VR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닌자… 가 아니라 룸메가 나타나서 상황은 해결됩니다.

엘리엇 페이지가 엘렌 페이지였던 시절에 찍은 영화 중에 하드캔디 라는 작품이 있는데, 초중반쯤에 스토리가 선로를 갈아타면서 주인공이 목표를 포획(?)하고 말하는 대사가 있지요.

놀이시간은 끝났어(Playtime is over).

놀이시간은 끝났고, 이제 장기자랑 시간입니다. 결국 반전-전복-복수로 마무리되는 얼큰한 작품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반전에 끌리고 복수에는 더욱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뭔가 걱정될 정도로 유행하는 갓세계물에도 흔히 사용되는 구조인데(퍽치기범에게 도망쳐 다녔던 내가 사실은 더 흉악범?), 유행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죠.

하드캔디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이미 2005년 작품이니 말하는 것이고, 어차피 트레일러에도 나오지만 여자아이가 소아성애자를 낚아올려서 씹뜯맛즐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어느 순간 소녀의 정체(사냥꾼)가 드러나고 남자와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든 뒤집힐 것이라는 점을 이미 전제하고 극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본 작품의 경우에는, ‘너는 여우 나는 사실은 호랑이’에서 사실은 내가 호랑이였다는 점을 사전에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도입부에서 룸메와 화자는 그냥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일 뿐이니까요. 앞에서 말한 트릭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어쩌면 독자가 간파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풍부하게 제공 될수록 좋은 트릭일 것입니다. 아, 사실은 그래서 그랬구나의 쾌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또한 반드시 독자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치겠노라고 알미늄 배트를 열심히 광내는 소설이 아니더라도 필연성은 이야기의 설득력을 더하고 그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결말의 근거가 제공되어야겠지요.

화자와 그 룸메이트가 비밀리에 곱창 전문점을 경영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픽션의 아름다움이니까요. 아쉬운 점은 그들이 실은 북두신권의 계승자였다거나 배트맨과 로빈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말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처음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어디서 많이 보던 술 취한 20대의 일상이었는데, 그 일상에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다 보니 결말의 반전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화자와 룸메의 정체에 대한 단서가 약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20대 여성이 할 만한 생각이 그에 어울리는 어휘로(실제 20대 여성이 어떻게 느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매끄럽게 서술되어 있어, 사건의 흐름이 박진감 넘치게 느껴지는 좋은 단편이었습니다. 한편 단편이라는 분량과 혼자서만 쭉 말을 하는 특성상 배경 설명에 할애된 부분에서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이 있긴 한데, 이를 좀 더 능청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봅니다.

 

범죄, 폭력, 살인, 이런 문제들은 좀처럼 나에게 일어날 법하지 않고 통계적으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꼭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호환 마마 전쟁의 가능성이 비교적 낮아지면서 어쩌면 약간 알딸딸한 상태로 시작한 밤 산책이 생사를 가르는 도주극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일상적인 불안이 그 지분을 차지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통계적으로 흔치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기도 하겠지요. 이득과 손해가 죽고 죽이기로 결판나는 삶은 분명 지옥이지만, 왜 가끔씩 지옥도도 보다보면 멋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카타르시스라는 명목으로 그런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를 정당한 상황과 대상을 은근슬쩍 갈구하는 것도 섬찟하지만 익숙한 어떤 괴물의 모습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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