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 존재, 실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선택이 그 모든 것입니다. 혹은 그렇다고 믿어야 합니다. 제정신인 척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라고 인식되는 자아 콤플렉스가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실제로도 선택해서 나 자신과 그 밖의 잡다한 것들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살아온 시간만큼 해 온 일인지라 우리 대부분은 그걸 썩 잘 하는 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담보되지는 않습니다.
스포일러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제목인 동시에 배경인 바벨을 먼저 언급하자면 좀 더 온건하고 현실과 풍부한 접점을 지닌 매트릭스로 보입니다. 실제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물리적 현실은 좀 삭막하지만 링크 커뮤니티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나름대로 사이버 유토피아 비슷한 외관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의 상당부분은 인공지능이 맡고 있는데, 이들에게 내장된 윤리의식은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있군요. 아무튼 어딘가 근사해 보이는 한편으로 섬뜩한 곳인데, 사실 이 이야기 자체가 상당히 섬뜩합니다.
한편, 이야기의 큰 줄기는 바벨에서 실종된 연우를 찾고 연우의 실종에 얽힌 이야기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주인공 올가와 문제의 인물 연우는 멤피스라는 도시의 보육원 출신으로, 할아버지라는 인물과 여러가지로 얽혀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이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이야기의 흑막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은근한 조정을 통해(넛지?) 아이들이 바벨에 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말하자면 바벨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연우는 할아버지의 가족이었고 할아버지는 연우를 바벨로 보내기 위해 올가를 이용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리뷰를 시작하면서 배경과 메인 스토리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올가에게 있어서 바벨이란, 제 삶에 대한 선택권을 스스로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것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를 떠나, 주체적인 선택 그 자체를 주인공 올가가 추구하는 바라고 본다면 여기에 반동하는 요소는 두 가지, 바로 바벨과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행위와 그 의도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연우를 포함해서)을 바벨로 보내고 싶어하고, 그 수단은 단순히 바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멤피스의 현실이 시궁창인 관계로 아이들은 쉽게 바벨행을 선택합니다. 아, 연우만 빼고요. 어쨌든 진실을 알게 된 올가가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죄책감도 못 느끼나?’
저는 할아버지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연우의 언동에 따르면 바벨과 링크커뮤니티, 감각 시뮬레이션 캡슐 등에는 눈물로 대표되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모래성보다 빈약한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원할 때 원하는 감각을 원하는 만큼 체험할 수 있는 상태라면 그것들에 특별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주 설득력이 없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딱히 원하지 않는 때와 장소에서 원치 않는 빈곤과 고난 속에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일까요?
저는 두가지 입장 중 하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대신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작중에서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할 때 그 원인은, 약간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바벨이 충분하게 나쁜 놈으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기에 바벨은 어쨌든 올가가 바벨에 가기 전에 기대했던 사항들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과 유의미한 직업, 그 직업과 관련된 교육, 기타 여가활동 등등. 그렇다면 그 대가로 사상적인 억압과 사이버공간 내의 가식적인 생활 등이 단조롭게 지속되는가? 체제를 우회해가면서 주인공을 조력하는 인공지능 양육자들과 셧다운제 같은 걸 도입하면서까지 현실 차원의 생활을 장려하는 정책 등을 볼 때 딱히 그런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도서관에 책도 있구요. 물론 이야기의 최후반에 가면 대체 이 AI들이 인간을 대하는 윤리규정은 누가 무슨 권한으로 만든 것인지 의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올가는 이곳에서는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린 뒤에 어쩐지 쉽게 바벨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지난 몇 년간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는데, 제 경우에는 그냥 생활환경이 건조한 것일 따름입니다. 아무튼 ‘그곳이 완전무결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반박해야 하는데, 물론 당연히 바벨은 완전무결과는 거리가 멉니다마는 그런 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짓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가 여러모로 부족한 느낌입니다.
아마도 실제로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도시가 운영된다면 바벨의 모습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제한이 있어 가상공간의 사용한계가 설정되고, AI가 인간을 보조하는 등등. 그러나 더 현실적인 배경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더 적절한 배경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케이블TV에서 재방송하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체 기계들은 뭐하러 인간들을 살려 놓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배터리로 쓰려고 살려둔다는 설명은 들을 때마다 문과도 아는 열역학 제2법칙에 이마를 치곤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매트릭스 시리즈의 서사구조를 돌아가게 만듭니다. 이래저래 말이 길어지지만, 한마디로 독자는 이야기를 위해 그 정도의 억지는 수용할 용의가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히 온건한 현실로 보이는 바벨 때문에 주제의 첨예함이 상당히 희석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연우가 주장하는 가상공간으로 구축된 생활과 그 가치에 대한 고민이라고 보고, 이제 다시 올가로 대표되는 선택에 관한 문제로 돌아오자면 역시 주제의 무게에 비해 주인공이 당하는 사건의 심각성이 애매했습니다.
AI인 소나와 파이아니가 ‘양육자’라는 묘한 직함을 가지고 있고, 할아버지가 실은 연우의 혈육인 점에서 암시되듯이 이 이야기에서 선택은 사실 성장과정의 선택이며, 그 선택의 이면에 존재하는 양육자(대개는 부모인 경우가 많은)의 그림자가 짙게 그려집니다. 바벨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간다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가면 여자친구 생긴다는 부모님들의 말이 생각나더군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경우, 그가 올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점은 바벨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것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요. 이건 대학 안 다니신 부모님들이 무조건 대학 가라고 채근하는 소리보다도 덜 심각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기자신과 바벨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빼먹었지만 커미션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죠 뭐.
한편 바벨 측에서는 소나와 뒤에(사실은 맨 앞에)나오는 인공지능 줄리가 이런 일을 하는데, 소나는 AI 자신의 판단으로 올가가 스스로 연우를 찾아나서도록 부추겼다는 의심을 사고, 줄리는 그냥 올가를 속입니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전자와 달리 ‘이 선택은 나 스스로의 선택이 맞는가’가의 차원이 아니라 ‘이것은 진실인가’의 범주에 해당하며, 이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설득과 기망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으니까요.
소나의 행위를 놓고 근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마음을 읽고 인간의 행동을 은연중에 조종한다면 인간은 과연 스스로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나눌 수는 있지만, 그러기에는 그 일을 실행한 인공지능 소나가 한 일에서 어떤 부분이 문제되는지 지적하기가 미묘합니다. 올가가 연우를 찾으러 가는 일이 올가가 의도한 바가 아닌가? 올가 혹은 연우의 이익에 반하는가? 혹은 올가가 아니면 연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올가를 조종한 것인가? 이런 식으로 소나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거나 의문시할 이유가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하고자 하는 일을 고무하는 것이 문제라면 오늘은 제발 운동 좀 하라고 부추기는 스마트워치도 업이 깊은 물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별 시덥잖은 리뷰어에게서 이렇게 기나긴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이 작품의 절대적인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작품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의뢰인에게 해롭지 않은 선에서’, 그리고 ‘양육자가 판단하기에’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해롭거나 해롭지 않은 것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인간이 지각하는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바벨에서 진정으로 디스토피아 다운 부분이 아닐까요? 대체 이러한 AI들의 판단 기준은 누가 어떻게 무슨 권한으로 설정한 것일까요? 이런 요소들이 설득력있게 배치되어 작동하기에 96매는 적절한 분량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올가나 연우가 아닌 바벨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대단히 궁금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리뷰가 너무 길고 중구난방인 점이 걱정되지만, 이 이야기에 궁금한 점이 많은 이유는 오히려 이 이야기가 잘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구어체 대사도 어색하지 않았고,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배경설명도 적절한 부분에서 잘 분배되어 이루어져 읽기에 불편한 점이 없었습니다. 불만은 앞서 말했듯,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반드시 같은 주제가 아니라도 작가님의 다른 글을 꼭 보고싶습니다.
이제 와서 주제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자기 삶에 대한 선택권을 스스로 온전히 소유한 상태를 득한 사람은 아마도 없고, 있었던 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이 두 분 생각나는데, 한 분은 삼위일체론에 입각할 때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시고, 다른 한 분의 경우도 제가 설명할 수 있는 존재의 상태에 있지 않으십니다.
그런 고차원적인 개념의 선택권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부모, 성별, 인종, 계급, 국가등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요소들이 항상 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에 인공지능이 한 숟갈 얹는다고 해서 이제 와서 크게 놀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지금도 우리는 AI의 끝없는 영향 속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구글에 아무거나 한번 검색해 보십시오. 저는 지난 달부터 인스타, 네이버 등등 가입된 모든 앱에서 턴테이블을 최저가에 구매하라는 독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달 쯤에는 살 것 같기도 합니다. 이건 그냥 성가신 일이지만, 비단 광고뿐 아니라 언론까지도 AI의 관리감독을 통해 제공되는 세상입니다. 오로지 클릭수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AI가 하루종일 복장 터지는 사건사고뉴스만 메인에 올리는데, 과연 제가 균형 잡힌 현실인식 속에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개진하고 설득할 자유가 있고, 누군가는 그걸 이미 AI를 동원해서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정당하다거나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유에도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어디에 설정할지가 문제이며 민주주의국가에서 그 선을 그을 곳을 정하는 방법은 구성원들의 합의뿐입니다. 아, 합의는 어떻게 하냐구요?
합의는 유혹과 설득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