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요즘 같은 시기에 읽기 좋은 소설입니다. 고등학생 ‘소혜’는 자기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드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능력은 소혜를 잘 아는 사람을 상대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소혜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쌓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소혜를 잘 알게 되면 그 사람 주변에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학교 친구들은 소혜를 ‘말 없고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가씨’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 설정에서 정소연의 단편 「비거스렁이」가 떠올랐습니다. 거기서도 주인공은 투명인간처럼 흐릿한 존재감 때문에 외로워하거든요. 하지만 「비거스렁이」의 주인공과 달리 소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위축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소박하게나마 이익을 취하는 쪽이죠. 소혜가 능력을 이용해서 주로 하는 일은 학교 수업 땡땡이입니다.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고, 그럼으로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유지하는 것도 소혜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고요. 그러니까 소혜는 스스로 외로워지기를 택한 셈이죠.
그렇다고 해서 소혜가 혼자서 외로움을 거뜬히 감당할 준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쪽에 가깝죠. 소혜의 집안에서 초능력은 모계 유전으로 이어지는 형질이라 능력을 발견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가문의 사명과도 같은 중대한 작업이거든요. 이 집안의 하나뿐인 딸 소혜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귀한 존재입니다. 당연하게도 소혜는 그 역할을 못마땅하게 여기죠.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가족의 저녁식사 장면입니다. 형식적인 자리와 경직된 대화에서 독자는 소혜가 가족 안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이야기의 큰 줄기는 소혜와 같은 반 친구 ‘안경아’의 관계를 따라 전개됩니다. 경아는 언제부턴가 소혜의 땡땡이를 알아차리고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외에도 소혜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또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경아는 안면실인증을 가지고 있어 타인의 얼굴을 구별하여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소혜는 그런 경아가 어떻게 자신의 빈자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만, 경아는 적당히 둘러대며 능청스레 넘어갑니다. 이후로 둘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진짜 ‘의미’가 피어나지요.
현실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은 SNS인 것 같고요. 한 번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점점 더 많이 갖게 되죠. 반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소혜처럼 타인의 시선을 그리 달갑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저 자신의 의미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도구적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겠지요. 그러니 혼자만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실은 누구보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애타게 갈구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죠.
그런 관점에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보면 ‘사라지고 싶은 것’과 ‘떠나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는 문장들이 사뭇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때마다 존재감을 줄일 수 있는 초능력이 있음에도 완전히 사라질 방법을 강구하던 소혜는 결말에 이르러 새삼 사라져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면 소혜는 앞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그동안 소혜가 바랐던 것이 정말 사라지는 것이기는 했을까요. 어쩌면 소혜가 정말로 원했던 건 의미의 소멸이 아니라, 반대로 의미의 발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지는 것과 떠나는 것의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요. 누군가에게 필요하거나 보여지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 여정에 서로를 처음 발견한 두 친구가 동행하는 것 역시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의 뉘앙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도 아주 많이 닮아 있네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인물의 능력이 더 구체적으로 구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소혜 어머니의 능력은 ‘보는 능력’이고 소혜의 능력은 ‘숨는 능력’인데 이야기는 이런 능력들을 단편적인 정보값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모계 유전으로 이어지는 초능력이라는 설정도 흥미로운데, 여기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연작으로 나온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내러티브를 입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듀나의 『아직은 신이 아니야』처럼요.) 여러모로 잠재력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