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자화된 좀비들
좀비와 코로나 바이러스는 비슷합니다. 둘 다 전염병이라는 양상을 띄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단지 ‘치유가 가능한 지점을 불가한 지점으로 이동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포칼립스적인 판타지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아포칼립스 장르의 좀비는 생존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한된 물자와 환경 속에서 좀비라는 위협으로부터 끝 없이 생존해야하는 비장한 비극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좀비는 일종의 사회의 메타포로써 기능하여 가상의 적 (Imaginary enemy)이 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좀비는 아군과 적 중에서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요소로 구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타자화된 나, 즉 우리의 몰락을 상징하는 매개체로써 기능합니다.
토도로프의 나의 주제군은 변신주제와, 초자연적 인물의 존재와 그들이 인간의 운명에 끼치는 영향력을 다룬 범결정론이 해당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좀비로써 변신하며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고, 초자연적인 인물인 ‘나’로 인하여 인간의 운명을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역설의 상태로 변신시키는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 과정은 전염병처럼 전파되어 ‘나’라는 존재들을 한없이 물화시키고 타자화시킵니다.
그의 반증으로 이 소설에서 좀비는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임과 동시에 인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서술됩니다. 아군과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요소에서는 당연한 명제입니다. 좀비하면 따라오는 말은, 살아있는 시체들이니까요. 이 역설적인 표현이 함의되는 ‘적’이라는 구분에서는, 죽여야하는 적이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좀비들에게 일말의 이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측’을 사회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명제는 역설적인 의미로 승화합니다. ‘이성이 있을 수는 있지만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임과 동시에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존재’ 라니요?
그런 지점에서 ‘나’가 ‘손님’들을 ‘대접’하는 행위는 이 타자화에 대한 저항이자 해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나’가 최종적인 국면에서 ‘아내’ 에게로 간다는 상상에서 명료해집니다. 내가 나일 수 없음을 그만두고 해방되며, 나를 사랑하는 존재를 통하여 나를 되찾는 일이니까요. 어쩌면 이는 내가 아내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해방을 스스로 해낸 것이 바로 아내니까요.
2. 좀비를 죽이다.
일반적으로 좀비들은 가상의 적으로써 ‘죽여도 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후지타 나오야는 ‘실제로 존재하는 민족이나 집단을’ 좀비로 그리는 것이 죽여도 좋은, 지저분한, 한심한 집단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하는 프로파간다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개인 사정으로 폐업합니다’에서 제시되는 좀비는 사뭇 위험하면서도 다릅니다.
코로나 감염자들로 피상되는 ‘좀비’들은 명백히 부여 받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한 맹목적인 폭력과 적의는 지양 되어야 할 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사회가 이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채 죽을 것을 기다리는 존재들에게 ‘접대’하는 행위는 맹목적인 적의와 공격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거기에 최종적으로 스스로가 좀비가 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폭사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에 대한 타자화와 연민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맥락은 동질감입니다. ‘정부가 미처 대책을 만들기도 전에 사라진’ 좀비들을, ‘내가 이어 사라지게’ 했으며, ‘나 또한 좀비가 되어 사라지는’ 일종의 과정은 전염병이라는 현상이 침윤하여 그에 패배하는 타자들을 ‘나’로까지 확장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진정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지적하는 것은 전염병 그 자체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소외된 개인이 양산되는 국면 이면에는 결국 전염병이라는 현상 그 자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자들과 분리된 전염병 자체를 좀비로 본다면, 조금은 다른 국면이 보이게 됩니다.
3. 리퀴드 모더니티
월드워Z같은 작품에서 제시된 빠른 발을 가진 좀비는 사회적 메타포로써, 바우만이 주창한 리퀴드 모더니티를 반영한다고 좀비 사회학에서 후지야 나오타는 설명합니다. 즉 가볍고 유동적인 성격이 사회를 종횡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네트워크의 와해, 집단적 행동의 붕괴를 인간은 커다란 불안을 맞이하고 있다. 와해나 붕괴는 막연하고 기준이 없으며 점점 더 유동적으로 변해 가는 권력의 가벼움이 가져오는 부작용이라고 한탄하는 목소리도 가끔씩 들려온다.”
‘리퀴드 모더니티’ 시대에 오면 ‘모던’한 것들은 차례차례 액체화되고 무너져갑니다. 노동 환경만이 아니라 커뮤니티나 인간관, 가치관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되죠.
작품에서 제시된 좀비는 분명 발이 느린 좀비들입니다. 하지만 직접 전염병을 퍼트리는 것이 아닌, 비말을 통해서 전염 시킨다는 지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렇다면 전염병 자체를 좀비라고 두고 본다면 어떨까요. 전염병이라는 속성만 분리해보면, 기체를 통하여 부지불식간 퍼지게 됩니다. 일단 기체를 통한다는 것 만으로도 유체적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발 빠른 좀비와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전염병의 좀비화는 코로나 시대의 리퀴드 모더니티에 대한 성찰과, 이에 따른 개인들이 타자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내러티브로 읽을 수 있습니다. 노동 환경은 무너졌고 고용 형태의 가변성이 더욱 강해졌고, 커뮤니티는 디지털으로만 종횡 하며, 아이들은 학교에 등교하지 못해 사회성이 무너지고 있다고도 지적되며, 인간관과 가치관도 기존과는 달리 붕괴된 지점이 관찰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인간성이 필요합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되찾으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분명 사회는 쓸쓸하고 서글픈 소식이 끝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서는 안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