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첫 문단만 보았을 때는 단순한 호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완독을 했을 때는 ‘단순한’ 호러소설이 아니라 ‘심오한’ 호러소설이라고 정정하고 싶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1. 보고서 형식에 대하여
보통 보고서는 ‘문학’이 아닙니다. ‘비문학’이죠. 정해진 형식이 있고,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너무 명확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으려면 그 안에 들어가는 사실이 그것이 문학적 수사 없이도 충분히 ‘재밌어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 보고서라는 형식을 문학에 많이 애용해 왔으며 딱딱한 보고서의 문학적 수사라는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아예 장르가 되어 버린 것 중 하나가 르포르타주입니다. 이 작품은 엄연히 말해서 르포르타주도 아니고 그 형식을 빌려온 것도 아니지만, ‘보고서’의 양식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기가 겪은 일들을 보고서의 목차에 따라 담담히 적고 있습니다. 그런 류의 보고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경우 보고를 위해 적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서 양식에 끼워 맞추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와 함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
해당 소설에 나오는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은 실존하는 논문이자 필름입니다. 소설에도 언급된 세르게이 박사가 주도한 이 실험의 내용은 정말 말 그대로 죽어버린 개를 소생시키는 실험이었습니다. 40년대 이 필름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거대한 충격에 빠졌고,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논쟁할 정도였습니다. 아니 사실 ‘소련의 선전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점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이 실험은 실존한 것이었고, 성공도 했습니다. 소련은 정치혁명 뿐만 아니라 생물혁명도 성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적어도 1940년대에는 확고히)가 지탱하는 국가였고, 이 사상은 ‘유물론’이었습니다. 정신보다 물질을 중요시했던 것이 유물론이지요. ‘보이는 것이 전부이거나 우선’인 사상이 바로 유물론입니다.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간단히 정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넣은 점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은 인민이 만들어 낸 힘을, 생산력을 믿었습니다. 기독교의 힘이 아니라.
그러니 당연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경제도, 정치도, 공장도 모든 것이 소비에트의 권능 아래에 있는데 생물이라 어떻겠습니까?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반동을 숙청할 수 있다면, 반동이 아닌 자를 살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소 빈정거리기는 했지만, 이것이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추동했던 힘이 아니었을까요? 보이는 것은 통제할 수 있다.
이 기원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뉴턴 이후 과학 사상의 변화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죠. 뉴턴 이후 서양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세상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능력은 언제 발현될 수 없지만, 수식은 직접적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질 공이 몇 초 뒤에 떨어질지 알려줍니다. 이런 생각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는 생각이 강화된 것이고, 미래가 예측 가능한 것이니 바꿀 수 있는 것도 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생명도 결국 그런 생각의 세례를 받게 되었죠. 그러니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지금도 일부 그 영향력이 강한데) 우생학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수한 형질의 인간을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 불량품 같은 인간만 제거하면 세상은 우수한 사람들만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지금 보기에 이는 비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역설했듯이 이성에 대한 강한 확신 그리고 근대가 가져다 준 과학적 사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생학자들은 철저하게 ‘근대적’이며,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떤지는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인간은 동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스스로 버렸고, 종국에는 자기 신체를 파괴하는 것까지 선택합니다. 어떻게든 더 좋게, 더 이성적인 인간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죽은 인간들은 결국 지금도 희생되는 동물실험의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겠죠.
그래서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이라는 보고서가 나온 곳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점이자, 무신론자가 지배하며, 현대 첨단과학의 선두에 있었던 소련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놀랍지 않습니다.
3. 동물실험과 정신이 망가진 인간들
그런데 이게 이 소설과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연관이 충분합니다. 이 소설은 동물실험을 다루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당하는 것은 소설의 화자가 말하듯이 ‘사람’입니다. 무엇에 의한 실험일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동물실험은 2번 항목에서 말했던 근현대 시대의 실험 경향들이 강하게 남은 영역입니다. 인간에게는 생명에 대한 상황통제와 생사여탈권이 극명하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동물은 기계가 됩니다. 동물을 위해 간단히 안락사를 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위의 관점들을 보았을 때 그저 기계의 스위치를 끄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점점 잠식되어가는 듯 합니다.
1940년대 세르게이 박사가 동물을 그저 기계로 여겼듯이, 그러다 결국 우생학과 같은 비극으로 인간이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실험들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자기 신체를 파괴하는 것까지’ 선택했다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2020년대는 그럴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요) 우생학은 잘못된 상식이고, 비윤리적이며 한때의 비이성적 경향으로 취급받습니다. 하지만, 동물실험은 다시 강조하듯이 인간이 그러한 경향에 ‘공개적’으로 빠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인체실험하면 갖는 기괴한 행동들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신은 마치 그것을 당하듯이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신체가 훼손되지 못하니 정신이 대신 그 상처를 입는 것이죠. 그렇기에 주인공이 동물실험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난 루시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은 이에 잠식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벗어나보려는 마지막 발악이겠죠.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시험체로 여깁니다. 보고서의 마지막은 불길하게 끝나지만, 기묘하게도 ‘보고서’의 마지막이라 객관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제 1번 항목 마지막에서 제기했던 부분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시험체로 자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서의 형태로 전달합니다. 이미 ‘이성적’인 것, ‘근대적’인 것의 극단성에 잠식당한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마저 ‘객관화’해보려고 시도한 비극이 이 소설의 보고서 형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정말 무서운 소설입니다. 형식부터 소재 그리고 내용까지 완전히 근대적인 공포를 잘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죠.
4. 나가며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대적’인 것이 마냥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소설이 반지성주의를 홍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어 왔고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성도 결국 근대가 쌓아 온 문명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아 올린 이성과 근대성에게 실험을 당하고 있는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도 그것이 ‘가장 공개적인 상태에서’ 극단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동물실험을 될 때 그러한 우울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굉장히 흡입력 있는 소설을 잘 읽었습니다. 생각도 많이 해보게 되었고요.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