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은 가상의 이야기에서나 현실 속 담론에서나 아주 많이 다루어지지는 않는 주제의식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 역시 독특합니다.
1. 메시지
소설은 실험동물을 직접 대하는 연구소 직원들의 내적 갈등에 대해 다룹니다. 동물실험을 내 손으로 한다는 것에는 어떤 일들이 포함될까요. 사람을 잘 따르며 작고 보드라운 래트, 기니피그, 토끼, 강아지와 같은 동물을 정성껏 키우는 동안 정도 들고 때로 교감도 합니다. 그러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약물을 주사하기도 하고, 대개는 끝내 숨을 거두게 만들어야 하지요.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동물들을 위한 위령제가 행해지기도 하고 어떤 동물들은 실험 후 연구원의 집에 따라가기도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연구소 안 생명체들은 종사자들의 마음에 큰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이렇게 큰 아픔이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에서 어째서 자주 다루어지지 않는지 생각해봅니다. 동물실험의 효용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됩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차마 실험 대상이 되는 동물들의 아픔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서 지고 있고, 그래서 나의 말은 곧잘 허무한 위선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구나 동물실험과 관련되어 종사자들의 심리적 외상에 대해 말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 이야기
소설은 형식 면에서, 일종의 일지나 보고서와 같은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굉장히 직설적인 소제목 같은 것이 그렇지요. 기본적으로 활자화된 이야기의 표현방식은 워낙에 다채롭지만, 이런 방식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인물의 심리 묘사나 서사 구축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소설의 화자 혹은 작가는 이야기 중간중간 자신을 실험체처럼 칭하고 ‘실험 주제’에 대해 서술합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동물실험을 하는 연구원의 고난에 관한 하나의 연구 보고서입니다. 독자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이 연구의 목적과 과정과 결과가 무엇인지 명확히 압니다. 사건이나 대사 혹은 주인공의 심리 서술에 사용되는 표현과 암시가 직접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논문이 그렇듯이요. 연구란, 하나의 가설에서 출발하곤 합니다. 이후 사용되는 모든 방법은 그 가설이 맞거나 틀림을 증명하기 위해, 즉 하나의 문장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매체는 조금 다르게 작동됩니다. 일반적으로 장르 소설은 소위 순문학보다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대신 한층 사건 위주로 흘러가고요. 어쨌든 두 갈래의 소설 모두 ‘연구’에 비해 명확한 주장을 하지는 않고, 소설 속 환경은 실험 환경처럼 모든 변수가 통제되고 걸러져야 하지 않습니다. 소설 안에서는 때로 인물이 작가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고 예상치 못한 결말이 기다립니다. 그래서 저는,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 속 화자가 소설 속 서사를 쌓아감에 있어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 및 소제목에서 드러나는 연구 목적과 가설을 잊지 않으려는 연구자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조금 내려놓는다면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조금 궁금합니다. 선정한 이론을 증명하려는 심리와 사건 서술 이외의 것들이요. 물론, 그에게 그런 엄격한 의무감을 부여한 것이 작가님의 의도이실 것이기에 지금의 고호 이야기도 슬프고 아름답고 관심이 갔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작가님이 연구소의 실험 환경이나 그 안의 딜레마에 대해 깊이 아실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때로 무척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디테일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런 전문 분야는 일반적 독자가 잘 알거나 관심 깊은 분야는 아닐 확률이 높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그런 낯선 주제 앞에서 독자는 인물이 자신처럼 보편적인 사건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 사건이 뜻밖이고 강렬하게 휘몰아칠 때 공감과 흥미를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이 멋진 소설 속 주인공이 연구소 밖 사건을 자유롭게 경험하고 서술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연구는 진행되는 내내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아야 하고 내외부 변인이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미처 통제하지 못한 변인 때문에, 또 연구 주제와 무관한 어떤 사건 때문에, 애초 세운 가설과는 전혀 다른 발견이 새롭게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아주 경이로운 발견이요. 개인적으로,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만들든 소비하든 저도 모르게 종종 어떠한 전개를 기대하곤 하는데요, 소설 속 사건과 인물이 그 기대를 저버릴 때 저의 세계는 새로운 발견을 합니다. 실패한 실험도,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이야기도 나름의 소중함이 있다고 믿습니다. 소설 속 아르바이트생은 연구소의 규율과 원칙을 어기고 매일 출근하자마자 병든 비글을 먼저 접촉합니다. 이 일은 다른 실험체들의 폐사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만, 이것이 결말이 예정된 동물들에게 그리고 연구소의 두 사람에게 정말 비극이기만 했을까요? 화자가 교수의 명령을 어기고 아르바이트생 대신 제 손으로 안락사를 시행한 일은요? 원칙은 중요하지만 결국은 생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실책이었고 비용을 치뤘지만, 정연씨의 행동은 비글 초롱이의 여생에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며 고호의 배려 역시 두 인물에게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겐 하나의 세계가 열립니다.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이라는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작품이, 부디 많은 독자에게 그러한 새로운 세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