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으로 시작해서 칼부림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시작과 끝이 그렇다는 것이고, 드라마 자체는 그렇게 잔혹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우울하지요.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단편들이 흔히 갖는 문제점 중 하나는 초반의 임팩트에서 오는 서스펜스를 좀처럼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인데, 적어도 「관람석」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긴장감은 시작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됩니다. 그건 단순히 칼부림이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에요. 칼부림은 물론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소재의 매력을 뛰어넘는 장악력이 있습니다. 전 그 장악력이 작가가 ‘죽음’, 그리고 ‘살인’이라는 테마를 다루는 솜씨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이야기 속에서 명시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건의 살인 사건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도입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나’의 눈앞에서 ‘종하’가 ‘한석’을 식칼로 찌를 때, 마치 현실과 비현실이 뒤집힌 것처럼 묘사되는 찰나의 감각이 바로 그것이죠. 이건 이 작품이 죽음을 직접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방식으로 다루겠다고 예고하는 선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만큼 강렬하고 충격적이에요. 살인을 목격한 주인공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사건에서 입은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도입부에 공들여 묘사된 살인 장면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죽음의 원형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첫 장면의 살인을 불러일으킨 과거 사연은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만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건 이 이야기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전개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의 비극적인 삶은 살인이라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독자는 그 과정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관객의 위치에 놓입니다. (물론 현실에선 비극의 역경을 딛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두 건의 살인은 구조적으로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살인도 마찬가지고요. 요컨대 인간은 어느 정도의 극한에 내몰려야 살인이라는 불가사의한 결정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냐는 것이죠. 그 객체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살인은 극도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질문이기도 하지요. 살인의 동기와 행위, 나아가 살인자를 이해할 여지를 남기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이 작품의 결말은 마치 살인자가 자신의 의지로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닌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성장 배경, 과거의 트라우마, 그리고 절망적인 현재가 마구 뒤섞여 주인공을 살인으로 몰아가는 식이죠. 결정적인 순간에는 신체강탈자의 모티프가 등장하고요. (그런데 이 부분이 그렇게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살인자를 옹호하거나 동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작가는 결론을 정해두지 않은 채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건 결국 장르 안에서 일어나는 허구의 이야기이고, 그 안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요. 질문도 마찬가지고요. 작품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살인에 관한 모티프는 각기 비중이 다르고 충격의 크기도 다르지만 모두 이면에 어떤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선 어떤 살인도 대충 일어나지 않아요. 신체강탈자의 살인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신체강탈자가 아무한테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독자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질문 하나를 던지는 셈이죠. 현실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속한 하나의 부품이자 동시에 현실의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나는 이 모든 살인과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관람석’에 앉아 그 질문을 마주하는 독자는 아마 이 이야기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