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마스크’라는 괴담은 십여 년 전 국내에서 활발히 유행했던 도시괴담의 한 종류다. 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이 예쁜지 물은 후에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면 흉기로 입을 찢어버린다는 다소 잔인한 이야기였다. 이 괴담은 1970년대 일본의 한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넘어와 큰 인기를 얻으며 총천연색 마스크를 쓴 여성의 괴담을 생산해 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일명 ‘빨간 마스크’ 기담은 ‘질문’과 ‘답변’의 과정을 통해 공포를 자아낸다. 질문자는 보통 정답이 되는, 또는 듣기 원하는 답을 정해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답변자는 상대로부터 의문형의 문장을 듣는 순간 맞는 답을 해야만 한다는 긴장감을 얻는다. 교육을 통해, 또는 사회적 관계맺음을 통해 우리는 모두 이 긴장감을 ‘학습’한다. 길을 묻는 이들에게 정확한 경로를 가르쳐줄 의무, 모르는 문제를 묻는 친구에게 정답을 가르쳐줄 의무는 누구나 살면서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죄송하지만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또는 ‘저도 오늘 이 지역이 처음이라’라고 얼버무려야 하는 상황도 있다. 이처럼 사람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답변을 찾지 못할 때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미안합니다, 또는 죄송합니다, 라고 덧붙여야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빨간 마스크 괴담은 이러한 ‘답변할 수 없음’의 긴장감을 잘 활용한 괴담이다. 대부분 괴담의 구전에서 빨간 마스크를 쓴 여성은 ‘내가 예쁘니’라는 질문을 한다. 자신의 외모를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는 사람 치고 이 여성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빨간 마스크의 특징은 강렬한 첫인상을 주는 것 외에도 (종종 간과되곤 하는) 다른 중요한 기능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마스크가 장기적으로 일상화된 지금, 우리가 안면인식의 불편함을 호소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이런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빨간 마스크의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여성의 눈 아래쪽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외모와 전체적인 생김새를 알 수 없다. 얼굴이 주관적인 미적 감각으로 어떠하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외적 특징이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빨간 마스크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질문자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괴담에서 이 지점이 강조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예쁘다’ 또는 ‘못생겼다’라는 답을 한다) 괴담 안에서 여성의 ‘마스크’가 중요한 가림막 역할을 한다는 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처럼 ‘빨간 마스크’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사이에 둔 질문자와 답변자를 중심으로 구도를 잡은 괴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이 괴담을 회상하는 것 치고는 꽤나 자세하고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건 아마도 ‘빨간 마스크’가 상당히 대중적이었으며 분명한 공포를 전달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은 이 이야기를 다시 쓴 작가가 있다. 변화된 것은 두 가지. 마스크의 크기와 질문의 내용이다.
불분명하게, 조금 더 으스스하게
공포소설의 대가 H.P.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가장 강하고 오래 느껴온 공포란 ‘미지에 대한 공포’라고 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상당한 시간을 끌며 긴장감 넘치는 음향효과를 삽입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모르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공포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앞서 언급했듯 ‘빨간 마스크’ 괴담은 여성이 마스크를 벗기 전과 후로 상황이 나뉘어 굉장히 다른 감정을 선사한다. ‘마스크’라는 물건이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이 괴담에서는 의외로 미지의 공포가 크게 기능하지 않는다. 돌이켜 본래의 괴담을 분석하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내가 예쁘니’라는 여성의 질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라는 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여성이 마스크를 내리기 직전까지 상당한 긴장감을 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괴담은 수많은 갈래로 갈라졌기에 어느 한 지류에서는 이런 답을 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줄기를 형성하는 ‘빨간 마스크’ 괴담에서는 이렇게 답변을 망설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이런 원형 괴담의 아쉬움을 달래주듯 Xx 작가의 단편 〈마스크를 쓴 여자〉에는 효과적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낼 ‘미지’의 상황이 등장한다. 이 미지의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작가는 원래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새롭게 변용한다. 하나는 마스크의 색과 크기이며 다른 하나는 질문의 불분명함이다. ‘〈마스크를 쓴 여자〉에 등장하는 여성은 얼굴을 온통 뒤덮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얼굴 자체를 인식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녀가 보통의 인간과 다른 특수한 존재임을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의 독특함은 오히려 이질감을 심화한다.
여성은 흰색 가면과 같은 큰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 그 여성의 얼굴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려면 상당히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마스크 밖으로 나오는 괴이함은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회색 눈동자에 키가 180cm즈음으로 보이는 여성은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이런 여성이 가까이 다가와 질문을 한다.
“○○ㅏ ○○ㄴㅣ?”
이렇게 기호로 대부분이 생략된 질문은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며 궁금증을 자극한다. 이 질문의 완전한 문장을 보기 위해서라도 독자들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를 쓴 여인이 질문을 건네는 형태는 읽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 작품이 ‘빨간 마스크’를 변용한 소설임을 알려준다. 게다가 서술자인 문방구 주인은 그 여자의 입이 양쪽으로 찢어지며 마스크가 붉게 물드는 장면을 가장 먼저 본다. 뒤에서 가위를 꺼내 문방구 주인을 위협하는 모습까지. 현대적 빨간 마스크의 재탄생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문방구 주인은 괴담 속 ‘빨간 마스크’를 목격하고 도망을 다닌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 이 주인은 이전과 달리 도망가지 않고 질문에 ‘답변’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에게는 여성의 물음이 ‘부탁’처럼 들렸던 것이다. 이런 답변자의 마음가짐 역시 본래의 이야기에는 없던 부분이다. 처음부터 ‘빨간 마스크’는 명확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독자가 원했던 질문의 완벽한 문장이 들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내가 예쁘니?
이 소설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큰 변화와 한 가지의 작은 변화를 통해서 원형인 ‘빨간 마스크’ 괴담을 성공적으로 재창작했다. 그러나 더욱 신선하고도 효과적인 변용을 위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마스크를 쓴 여인’을 ‘빨간 마스크’ 괴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결말의 문장에서 급작스럽게 이야기가 맺어진다고 느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원작의 빨간 마스크 역시 이 소설에서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으며, 둘째, 그렇기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욱 현대적으로 한 단계 나아간 괴담을 위해서는 이 마스크를 쓴 여성이 묻는 말을 작가 나름대로 변형할 필요가 있다. 문방구 주인이 여성의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주기를 원하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이 부분과의 조화를 잘 고려하면 좋을 듯하다. 빨간 마스크 설화는 실상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한계를 갖는 괴담이기도 하다. 그런 비판점을 고려하여 오히려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던 빨간 마스크가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결말을 설정한다면 어떨까. 효과적인 반전과 함께 단단한 사회적 메시지를 생성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을 판단하는 것만큼 모순적인 행위는 없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에 완성되는 질문은 소설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던진다. 기존의 괴담에서 ‘빨간 마스크’가 어떤 가치를 생성해내지 못한 채 자극적인 이야기로 소비되었던 것에 반해 이 소설에서는 진하고 분명한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보였다. 한 가지 더 이 작품을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 변화는 ‘배경’의 설정이다. ‘빨간 마스크’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배경이 확실한 현대성을 드러낸다고 보기가 어렵다. 문방구란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시간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기재가 필요하다. ‘신선한 현대적 해석’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현대적 배경’은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또는 전염병이다. ‘여인’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지금을 배경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훨씬 시의성 있고 최신의 상황을 반영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사회적으로 당연해진다면 기존의 ’빨간 마스크‘ 괴담에서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지점으로서의 전환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배경 인물들이 잔인하게 죽임당하기 전, 천진한 얼굴로 마스크에 관한 농담을 던질 수 있고, 약간의 개그 코드를 넣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지금, 더욱 튀어보이기 위해 (또는 더욱 으스스해 보이기 위해) 큰 마스크를 뒤집어 쓴 빨간 마스크의 웃기고 슬픈 상황을 역설할 수도 있다.
이처럼 독자들이 예상 가능한 ‘빨간 마스크’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이 소설에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작품을 조명하며 새로워질 수 있는 지점을 큰 골자로 엮은 후, 세부적인 수정이 이루어진다면 더 신선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작품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것은 온전한 작가의 선택이지만 독자로서 해본 이런저런 상상이 작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남겨 보았다. 더 좋은 방향의, 더 분명한 메시지의 가능성이 충분한 작품에 부리는 욕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맺으며
Xx 작가는 하나의 호기심을 이끌고 간 후에 결말에서 완성하는 희열을 독자가 바라는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작가다. 비교적 최근의 괴담인 ‘빨간 마스크’를 효과적으로 서사화하여 기존과는 다른 진행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공포 소설을 즐겨 읽는 많은 독자에게 색다른 공포를 선사할 수 있는, 특유의 진행 방향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꾸준히 글을 쓸 때 두터운 팬층을 형성할 가능성 역시 있다. 문장과 이야기 설정에 막힘이 없어 읽는 데에 수월함이 있다는 건 작가로서 큰 장점이다. 그런 작가가 그려내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공포 소설을 더 많이 읽고 싶다는 건 독자로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다.
호러의 팬으로써 좋은 작가를 한 명 알았다.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
가위를 숨긴 채 몰래 다가오는, 슬프게 큰 입의 여자만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