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용
용은 인간에게 숭배 받고 싶어합니다. 종교적인 성격으로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용이 선택한 방법은 ‘인간 다운 인간’을 창조해내어 권위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창조를 해도 ‘인간’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용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관찰하기 위한 사고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생각이 많이 든 캐릭터는 용이었습니다. 신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용이라니. 하지만 종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 믿음을 빼앗아가는 행위는 어쩐지 신살자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니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에, 신 보다는 종교를 살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아무쪼록 신자가 없는 신은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이 소설은 여기에 더하여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반대로 신은 피조물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가?
근데 그 것이 신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리 실제로 있는 지 없는 지 알 수도 없는 신이라고 한 들, 신은 신인데 말이에요. 그 신은 전지(全知)하고 완전무결한데요. 용은 인간에 대해 앎으로써 전지성을 획득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획득한 신성이, 신이 뜻하는 것인지 종교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런 점에서, 한 가지 더 재미있던 점은 어떤 관점에서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니체의 주장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성을 취하기 위하여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것을 탐하는 신의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뭐 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무결하면서도 전지적인 신이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으로써 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하죠.
복제 인간과 피조물
복제 인간과 피조물 역시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만들어진 인간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논쟁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과 사고는 인간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편적이고 편협할 지라도 인간의 면면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면면을 지닌 존재를 완전히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인간이되 인간이지 못한 존재 역시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종이라고 할 순 없을까요? 허나 다양성이 교차되고 인식이 재정립 되는 시대에서 조차 이들의 존재가 쉽게 용인 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도덕적인 이유든 현실적인 이유든 간에 이들의 존재가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피조물은 자살 희망자가 되어 산화 됩니다. 그는 자살로써 인간 다운 죽음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살아서 인간일 순 없어도 죽어서는 인간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체 강탈자
좀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 글이 SF적인 느낌도 난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였습니다. 외계 종족이라는 느낌 이여서요.
신체를 빼앗는 존재의 과거는 어쩐지 사냥으로 먹고 사는 원시 시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구로 넘어오면서 삶이 획기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살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며 삶을 이어가게 된 것이죠. 수렵 사회에서 3차 산업으로 확 바뀐 것 같지 않나요. 그러나 그들이 빼앗은 신체의 기억을 받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냥할 때 싱싱하고 건강한 육체들로 이어온 것과 달리, 정신 건강이 나쁜 것들로 살게 되어 삶에 질이 떨어지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서비스업으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것까지 꼭 닮은 것 같아요.
복제 인간이 인간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논쟁이 있다면, 신체 강탈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써 존재한다는 점에서 논쟁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을 바탕으로 본체의 성격과 기억을 모방하는데 말이에요. 그렇지만 후자는 종의 본능으로써의 차이점이 분명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종족으로써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인간이 아닌 걸까요. 그들이 가지게 된 신체와 기억은 분명 인간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에서 신체 강탈자는 자신의 무언가가 깨지고 인간적인 부분을 자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복제 인간과 궤를 같이 합니다. 단지 종족으로써의 본성이 달리 공존하게 될 뿐이구요.
자살 희망자가 아닌 대상으로 일종의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어떤 점에서는 살인이고, 어떤 점에서는 살인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살인의 인은 사람 인이니까요. 근데 사람이랑 인간이랑 같은 건가요?
흡혈귀
흡혈귀는 예로부터 공포의 존재로써 다뤄져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약자의 면모로도 그려지고 있기도 합니다.
흡혈귀의 겉모습은 인간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치료할 수 없는 전염병에 감염된 인간 같은 것이니까요. 이들은 폭력적이고 악하며, 유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져, 공포와 폭력의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 부적응자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의 흡혈귀는 사회적인 규범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어 규정된 악함과 약함으로 훼손된 인간성, 그 너머의 본 모습을 바라봐주기를 요구합니다. 자신에게도 인간으로써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고뇌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선함 그 자체를 인간성으로 생각하고 있어,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 인간(?)’은 흡혈귀가 처한 상황을 인간적인 요인으로 치환해주며, 본질적으로 인간은 악하다고 정의하여 그녀를 긍정해줍니다. 사실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아 탄생한 존재를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렇습니다. 판타지의 침식으로 다양성이 인정된 사회에서는 그 쯤 해줄 여유가 있지 않을까요.
진짜 인간(?)
스스로를 웨어울프라고 블러핑을 친 이 인물을 보며 작가님의 입담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고 실험 의도의 전제부터 망가뜨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깔끔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며 정말 통쾌하더라구요.
용은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합니다. 그런 요소로 판단된 인간은 악하고, 유약하고, 폭력적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들 모두가 알고 있듯 인간은 그런 요소 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실험의 인물들은 한 축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모두 약하거나, 악하거나, 폭력적인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결국 실험의 서두부터 파국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모두가 비슷한 부분을 노출한다면 본질의 다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한 쪽 극단이 다른 극단을 모방하고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악설이 그러하죠. 인간은 본성은 악하지만 사회 속에서 선함을 배우고 학습합니다. 그 것은 일종의 가능성이죠. 이 가능성 또한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듯 싶습니다.
인간성을 정의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은 얼핏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파고들면 머리가 아픕니다. 영지적으로 인간이 인간 다운 것임을 증명하는 일은 인간으로써도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파국 아닌 파국이 이 사고 실험의 결말로써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극단의 인물로 극단에 이르렀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습니다.
인간의 신을 꿈꾼 자를 꾸짖는 게 인간이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