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는 여러 뜻이 있다. 성년자에게 부여되는 자유로움, 외적인 제약이 없는 상태 등 사전은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중 눈에 띄는 것, 그리고 특별히 종교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의미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음에도 자유로움을 주었다. 종교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를 부여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신’에서 ‘인간’에게 흐르는 일방적인 수혜를 가리키던 자유의지는 최근 SF 창작물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지점으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바로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지는 점점 ‘인간성’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정 논리에 대응하여 행동하는 기계와 달리 사람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로 인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기준에서 신에게 적용되느냐 기계에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판이하게 갈린다. 신 앞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의 ‘종속’을 드러낸다. 자유의지는 삶의 ‘자유’마저 신에게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천부적 나약함을 부각한다. 하지만 기계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해방’을 드러낸다. 기계의 입출력과 사람의 선택은 다르다. ‘너희’ 기계와 ‘우리’ 사람을 가르는 시작점은 자유의지다. 그렇기에 이 말은 양날의 검과 같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단어다. 동시에,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를 잘 담고 있는 말이다. 많은 SF 창작물이 말하듯, 그리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있듯 인간은 전기 신호의 흐름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여기는 모든 과정이 사실 ‘경험’과 ‘데이터’에 의해 축적된, 하나의 논리회로에서 촉발된 ‘신호’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사람과 기계의 차이는 여기에서 허물어진다. 자유의지가 단지 입출력의 결과라면 인간은 단지 ‘효율적인’ (정말 인간이 효율적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유기물 기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전복적 사고의 시도는 단순히 인간 존재를 낮추는 것 같지만 그 이상의 효과가 있다. 오랜 시간 타자화되던 우리의 동료, ‘기계’가 비로소 삶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멀어지는 한걸음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다.
근데 이 소설에는 기계가 안 나와요
장황하게 인간과 기계의 위치와 전복을 이야기했지만, 이 소설에서 대비되는 건 인간의 자유의지와 로봇의 논리회로가 아니다. 알렉산더 작가는 〈버튼〉의 진행에서 “머리 속에 컨트롤러를 이식”한 사람들을 보여준다. 기계를 다루는 알렉산더 작가의 상상력은 장편 『파라미터O』에서도 볼 수 있듯, 굉장히 이색적이다. 특별히 엽편 〈버튼〉에서 시도된 이 설정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으로부터 부여되었다는 고전적 상상력과 인간과 기계는 자유의지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비교적 최근의 인식을 동시에 낯설게 보이도록 한다. 기계와 인간의 대비가 없이 ‘자유의지’라는 속성 하나만으로 두 가지 반전을 동시에 해낸다. 〈버튼〉에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건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컨트롤러’라는 조절의 매개가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손쉽게 다른 인간을 전통적으로 타자화되던 기계의 위치로 격하시킨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은 세 단계로 나뉜다. ‘신-인간-기계’의 위치에 각각 ‘신으로서의 인간-고유의 인간-기계로서의 인간’이 삽입되는 것이다. 신으로서의 인간은 기계로서의 인간에게 컨트롤러를 이식한다. 그리고 고유의 인간은 아직 컨트롤러를 이식받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간은 신을 숭배하던 시각과 기계를 타자화하던 시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동족의 계층을 나누기에 이른다. 신으로서의 인간은 기계로서의 인간에게 ‘해방’의 의지마저 주입하거나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개척민은 자유의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개척사회 헌법”은 신으로서의 인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버튼〉의 초반에서는 컨트롤러를 쥔 자에게만이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은 심지어 “개척민들의 자유의지를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한다는 명목을 동일 집단에게 세뇌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이 소설은 단 한 명의 인물이 흥미를 촉발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신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신분을 갖고, 자유의지의 정점에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위치에 의문을 품는 ‘나’는 팀장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음에도 타인의 ‘해방’이라는 감정을 조절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방’을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는 버튼을 누르는 데에 애를 먹으며 그는 정말 ‘기계로서의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같은 종으로서 옳은 일인가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그에 반해 팀장은 ‘나’를 쉼 없이 위협하며 개척민이라고 명명되는 이들을 계급상 ‘하층민’을 다루듯 한다. 둘은 이 작품 안에서 극명히 대비된다.
팀장이 강제로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나’는 팀장의 아래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실제로 사회적 위치도 팀장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런 위계의 설정은 마치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하찮은 양 치부하는 일반적 현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해방보다는 정해진 기준에 맞추어, 튀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답이라는 양, 버튼을 누르라는 상사의 명령은 꽤나 위엄있게 들린다.
그러나 반전은 항상 마지막에 있다.
자유의지를 전복하는 진정한 자유
이 엽편이 짧지만 강한 이유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결말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팀장이 강제로 버튼을 눌렀음에도 사람들은 해방을 부르짖는다. ‘부여된’ 의지가 아닌, 실제로서의 자유가 이야기의 결말을 장식한다. 원인 모를 오류. 어쩌면 그것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듯하다, 작가는 하나의 장치에 위태롭게 내맡겨진 존재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섬세한 감각으로 그들을 어루만진다. ‘해방’이라는 시원한 단어가 쓰였음에도 옹골찬 마무리가 가능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으로서의 인간’, ‘고유의 인간’, ‘기계로서의 인간’은 순서대로 상위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 마치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처럼, 인간에게 ‘내려진’ 자유는 어디까지나 제한적 자유의지에 불과했다. ‘제한’을 받는데 ‘자유’의지라고 하는 표현부터가 몹시 어색해야 한다. 그만큼 무엇과 무엇을 나누어 위계를 부여하는 건 불편한 일이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기계를 지배하는 세상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자유를 모방하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버튼〉은 이렇게 따지자면 아주 진지하고 철학적인 논의가 가능한 엽편이 된다. 하지만 이 감상에서 태곳적의 신을 불러와 모든 것을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진정한 해방은 위계의 소멸로부터 온다. 〈버튼〉 안의 세계에선 조금 비약적인, 알 수 없는 오류가 위계의 벽을 부순다. 심지어 이 오류의 원인조차 독자는 알 수 없다. 우연하고 아이러니한 해방은 이렇게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도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잘 다듬어진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진행은 이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신’과 ‘인간’과 ‘기계’의 위치 전복은 이런 우연밖에는 이루어내지 못할 것 같다. 아주 공고한 벽을 하나하나 부수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든다. 해방, 자유의지로부터의 신속하고 진정한 해방만이 필요하다.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부여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의 행동에 어색하지 않고 자유로운 곳. 그것이 궁극적으로 ‘고장난 프로토콜’이 지향하는 바일 것이다. 체계적 실행과 알고리즘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지만, 그 사소한 명령 불복종은 많은 이들을 자유롭게 한다. 오히려 억압하려는 누군가의 시선은 저항의 불씨를 폭발시킨다.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했죠”라는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양아치같은 독립주의자 새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평범하고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자화와 억압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작은 망치가 되었다. 그 망치가 부순 벽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벽의 크기는 엽편이라는 길이를 초월한 이 소설의 메시지와 무게가 같다.
맺으며
‘항-독립 프로토콜’은 인간을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코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그건 누가 버튼을 누르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독립과 해방을 향한 당위성은 생뚱맞도록 당연하게 완성된다. 알렉산더 작가의 SF는 종종 기계에서 출발해 인간을 가리키는 느낌이 강하다. 모든 소설에서 메시지가 향하는 대상은 사람이겠지만, 알렉산더 작가의 소설은 유독 인간을 향하는 결말의 색이 강하다. 기계를 만든 인간, 그들을 ‘창조주’라 부르는 상상력은 장편 『파라미터 O』와 엽편 〈버튼〉에서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두 소설은 모두 기계에서 시작되어 사람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이 작가의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계를 향한 사람의 시선, 사람을 향한 기계의 관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대응된다.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이거나, 때로는 잔인하게 누군가의 해방을 방해할지라도 그 끝에는 사람이 서 있다. 알렉산더 작가의 작품 속 기계는 사람을 닮아있다. 그것은 서정적으로, 또는 잔인하게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이 된다. 그래서 이 사람과 로봇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아니, 이 사람과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끊임없이 관계를 반추하는 소설이 여기에 있다.
엉성한 세계의 욕심 많은 사람들로 이렇게 밀도 있고 감동적이며 반전 있는 엽편을 써준 작가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진다. 그는 아마도 기계와 인간의 궁극적 화해를 이루고자 오늘도 펜을 드는, 아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다음날에는 이전보다 나은 관계가 세상에 하나 더 늘어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믿음에서 상상을 뻗어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오늘도 차가운 알고리즘을 이기는 해방의 따뜻함이 어딘가에서 우연히 생성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종말과 이기주의의 삭막함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결국 온기를 담아내는 작가란 이런 사람이다.
자유와 의지의 종착지에는 언제나 ‘나와 같은’ 존재가 서 있다.
꾸준히, 그리고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