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이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단순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 아닐까.
다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살고 있는 양태를 따라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좀 고민해봐야 할 문제기는 하지만.
아델도 마찬가지다. 아델은 가족 사이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아 끝없이 헤맸고, ‘월계수’ 음식점에서 묵묵히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 가계에 보탠다. 그럼으로써 가정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받으려 하지만 내심 늘 불안하다. 만약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면? 그때도 나를 사랑해줄까? 그래서 아델은 묵묵히 뼈가 부서져라 일해 돈을 번다. 그런 모습에서 가정 내에서 확실한 사랑을 받지 못한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입양된 후 친자식이 태어나는 바람에 늘 불안을 안고 살았을 아델은 월급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난데없이 성별이 바뀌는 저주를 받아 하늘을 나는 배에 오른 이후로 아델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찰해보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려 애쓴다. 그 와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보석을 훔친 율리안을 설득해 보석을 돌려주러 가게 하면서 과거를 외면하고 도망치지 말라는 충고도 남긴다. 율리안은 아델이 뭘 모른다며 투덜대지만 자신도 모르게 감화되어 아델과 행동을 같이하게 된다.
보석을 돌려주는 걸로는 부족해 없애려고 마음먹은 다음, 아델과 율리안은 보석을 파괴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보석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엘프, 드워프, 도깨비, 인간 4종족이 모두 있어야 하기에 그들은 각 종족을 돌아다니며 수장을 설득해 원정대를 구성한다.
원정대를 꾸려 보석을 파괴하러 가는 여정 동안 아델은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각 종족을 방문하는 동안 점점 아델의 내면은 점점 성숙해지는 것 같지만, 핵심까지는 닿지 못했다. 보석을 파괴하려 했을 때 실패했던 게 바로 그 증거라 하겠다.
그러나 그 긴박한 순간에도 아델은 자아성찰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는 자신을 용서했다. 돈 버는 기계로만 살아가던 지난날을 용서하고 받아들였을 때 아델이 느꼈을 해방감이란 형용할 수 없었겠지.
애정결핍이라 늘 외로움, 불안을 느꼈던 것도 자신, 저주에 걸려서 당황하던 것도 자신,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자신, 청소를 잘 하는 것도 자신, 남을 잘 포용하는 것도 자신, 덤벙거리고 사고를 치는 것도 자신. 그 모든 것이 모여 스스로를 만든다는 것을 아델이 깨달은 후 보석은 파괴되고, 아델의 저주도 풀린다.
다시 월계수 식당의 조리사로 일하는 아델이 율리안을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예전과 같이 식당에서 일할지라도, 자신이 겪었던 모험을 아델의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 예전과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제와 다른 하루를 살아내는 거라면 충분히 발전했다고 할 만 하지 않은가?
삶의 무게, 마음가짐,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아니면 생각대로 살 수 없는지 갈릴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제일 최상의 선택이겠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 또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인구 수가 5천만이면 사정이 5천만 개, 70억이면 사정이 70억 개인 것을. 현재 자기 삶의 모습은 최상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고른 최선의 선택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이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 그러나 어제와 다른 나로 살아보기 위해 한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아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여야 하겠지. 본인이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도, 본인이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도 모두 스스로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직면할 때, 그때 비로소 어제와는 다른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읽는 내내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반지의 제왕이 떠올라 나름 비교도 해가면서 재밌게 읽었다. 마지막 여정에서 급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개연성과 설명이 좀 부족했다는 것만 빼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싶다면 <하늘을 나는 배>를 한번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