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은 소설에서 주인공에게 일종의 한계로써 기능합니다. 이 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보호받지 못하고 냉혹한 현실에 내쫓기는 것과 다름 없는 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속은 일반적인 성장이라고 볼 수 없으며, 동시에 일반적인 성장보다는 좀 더 잔인한 성질을 지닙니다.
아이라는 입장에서 현실은 홀로 쉽게 나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청소년은 보호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권리 역시 어느 정도 제약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 폭력은, 청소년으로써 권리마저 제한 당한 채 보호 받을 권리까지 빼앗긴 그런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긋지긋해, 집 안에 정상인 사람이 하나도 없어, 빨리 벗어나야 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 역시 이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단순히 이 공간을 떠난다고 해서 이 이상하고 우울한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도망쳐 봐야 내가 나한테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텐데. 지금에야, 나중에 독립할 거라는 희망을 붙잡고 하루하루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살 수 있는데, 그 때는, 다른 숨을 구멍도 없이, 내가 나로 가득 잠겨서 숨이 막혀버리면 어떡하지?
주인공인 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결국 극복할 수 없음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습니다. 청소년인 나에게는 어른들의 방임이 폭력이며, 이에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폭력이 방임 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폭력이 하나만 벌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구조에 염증을 내면서도 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 일종의 이니시에이션으로는 읽혀지지 않습니다. 단지 환상성 속으로 도피하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누나인 나는 현실의 지점 속에서, 동생의 환상성 속에서 문제적 개인으로써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피야말로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문제의 반증입니다.
나의 문제적 개인의 징후는 위에서 스스로 언급했지만, 동생인 재하가 문제적 개인이라는 징후는 암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나타납니다.
재하가 달리고 있었다. 멀리서 내려다보는데도 한 눈에 재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하는 어렸을 때부터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중략)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하면 어딘가 닿을 것 같은데, 결국 매번 닿기 전에 몸이 멈춰버려.”
달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어디론가 닿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작 중에서 나타나는 달리기는 아이들이 그린 원의 지름 사이를 달리는 왕복 달리기입니다. 왕복 달리기는 결국 체력적인 한계가 있을 테지만, 명확한 도착점이 없는 달리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끝없는 왕복 달리기는 재하가 자신이 속할 세계를 찾지 못한 채 끝없이 헤메는 것으로도 읽혀집니다. 특히 이 원 속을 배회한다는 지점은, 원이 상기하는 영원성과, 둥글디 둥근 ‘세상’이라는 상징을 동시에 암시하는 듯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닿을 곳을 상실한 재하는 현재의 세계에서 끝없이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재하가 가로수의 거의 맨 꼭대기에 위태위태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상식적으로 재하의 무게를 버티지 못할 정도의 얇은 가지였다. 그런데도 재하는 우산도 없이 그 나뭇가지 위에서 태연하게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방황하던 재하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땅에서 놀라 재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비극적으로 느끼는 집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갑니다.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구조적으로 상승과 하강의 교차가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즉 현실 속에서의 문제적 개인인 ‘나’와, 환상 속에서의 문제적 개인인 재하가 교차하고 대비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이 임시로 봉합 되나 균열이 일어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가족의 파국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화인 상태에서도 동생을 지속적으로 케어해줍니다. 그러나 동생은 이 파국에 가까운 가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위로, 더 위로 가고자 합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마치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손은 힘이 들어가 붉게 변했고, 재하의 손은 피가 안통하는 지 하얗게 질렸다.
구조적인 대조가 한번 더 일어납니다. 붉은 색은 보통 생명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순수(純粹)와 신성(神聖)을 상징합니다. 어찌보면 이는 현실과 비현실을 한번 더 대조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재하는 ‘마치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듯이 환하게’ 웃습니다. 그리하여 한없이 떠오르는 것은 둥글디 둥근 지구에서 벗어나 자신의 속할 세상인 우주로 내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눈물겹고 환상적인 부분은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재하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단순히 재하는 자신이 진정으로 있을 자리를 찾은 걸까요? 아니면 감기에 걸려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밤 하늘의 별이 되었을까요.
골드만은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정 폭력이라는 타락한 사회에서 나와 재하의 방식은 이런 사회적인 모순을 폭로하고 현실을 비판합니다.
현실의 냉정한 부분들이 환상과 교차되며 서글픈 현실을 조명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환상이 설핏 감춰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가려진 부분들이 되려 상상력을 통해 날카롭게 현실을 비추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아이들이 자신이 있을 곳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재하가 자신이 택할 곳을 ‘선택한 듯’한 부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를 강조합니다. 밤하늘의 별은 아름답지만, 그 별에 새긴 우리들의 이야기는 서글플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