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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자격증 시험이었다!
(본문.1-P1)
목차
1.『이세계물』에 대한 단상
2.창조(?)적인 『개그』 한 사발 어떠세요?
3.『아저씨』의 쓴맛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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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세계물』에 대한 단상
요즘 시대에 ‘이세(異世)계’라는 말로 특정 장르를 정의하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고착화되었고, 클리셰라는 이름으로 세부적인 요소들이 정의되는 것을 보면, 그 장르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이세계물’에 여러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모종의 계기로 현실과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용사’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되는 이야기는 기분을 간지럽게 만드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다만 해당 장르에서 보이는 고착화된 흐름과 소재들은 장르 자체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지는 듯한 시선이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물론 특정 소재들이 ‘장르’라는 이름으로 엮인 이때 신선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해당 장르가 발전할 수 있는 태동기에 과거를 답습하며 머무르고 있는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은 <용사산업기사 따기>라는 작품은 제 감겨 있던 눈을 살포시 뜨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평범한 소시민이 수상한 가상현실 기계에 접속하며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다는 설정은 여느 장르에서 익숙하게 보던 줄거리를 보여주는 듯하나, 이야기를 진행하며 엿보이는 감각적인 소재들은 작게나마 감탄사를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이 완벽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혹자가 소설을 쓰는 기술적인 면에서 비판을 던진다면, 대부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개연성과 문장력 면에서 그 밀도가 낮은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작품에 대한 피드백 보다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매력을 발골 해 보는 쪽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만 잘 하기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 하나가 눈에 띄는 이 작품을 전혀 폄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창조(?)적인 『개그』 한 사발 어떠세요?
사실 <용사산업기사>라는 제목을 접할 때부터, 이 작품이 상당히 톤이 가벼울 거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용사’도 ‘산업’도 어딘가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붙여놓고,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는 인식을 준 것만으로도, 그 과정이 유쾌하게 삐걱거리리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1-P.78) “용사입시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P.111) “용사님, 이건 게임이 아니에요. 용사님 목숨을 하나에요.”
(2-P.83) 택시기사인 내가 이세계에서 용사라고? 용사가 되면 진짜 재밌을 거 같았는데 두렵기 그지없다.
다소 극단적인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용사입시학원’에 강제 입학하게 된 주인공을 그리는 장면은 블랙코미디와 같은 웃음을 유발하는 데에 적절합니다. 제가 호평하는 점은 이 가볍고 얼렁뚱땅 이어지는 톤이 작품 내내 유지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톤의 주체는 이 작품이 갖고 가는 주인공의 ‘컨셉’에 있었습니다.
(2-P43) “포장 잘 하세요?”
(2-P58) “내가 볼 때 당신은 포장을 잘 하니, 포장용사로 가세요.”
‘포장’이라는 키워드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택배’와 관련된 직종이었습니다. 당장 작품의 서두에서 택배를 배달하는 심부름을 맡는 것이 첫 장면으로 제시된 만큼, 그와 연관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2-P.116) 그는 붉은 머리 참전용사 앞에 있는 귀리죽에 물을 붓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걸 먹고 포장해 봐.”
(3-P.17) “한 가지 주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잘 포장하셔야 하고, 잘 포장한 사람이 생존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덩치가 좋고 근육질이라면, 정말 싸움을 잘하시겠어요, 라고 하겠어요.”
관습적으로 상대의 단점을 가려주는 말들을 ‘포장한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이 작품은 그런 ‘포장’이라는 방식의 ‘아부’를 주요 컨셉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주 의도적인 말장난인 셈이지만, 그 인상이 나쁘지 않습니다.
(6-P.62) 그래 이건 포장을 잘 해야 해. “제가 보기에는 여왕님 몸매가 S라인에 아주 훌륭하십니다. 완벽한 몸매라서 뺄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부딪히는 ‘마왕’마저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혀 세 치로 맞서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왕의 외모를 칭찬하고, 비위를 맞추며, 그 포장이 부족하면 자리에서 쫓겨나는 등, 마치 주인공이 살아왔던 ‘사회생활’의 단면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애잔함마저 느껴집니다.
이런 개그의 힘은 ‘비굴함’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위치를 연신 부각시키면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강조하는 것이죠.
이 작품은 그런 부조리는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가볍게 표현하면서도, 그 상황만큼은 위기감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작품이 묘사하는 ‘모험’은 용사에게 걸맞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모험에 맞부딪히는 시련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겠습니다.
3.『아저씨』의 쓴맛을 느껴보세요.
뜻밖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이 택시기사 일을 하던 ‘중년남성’이라는 것은 제법 눈길이 가는 요소입니다. 관습적으로 ‘용사’와 ‘모험’은 사춘기 소년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감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중년’이 주는 이미지는 사회생활의 중턱에 머무르는 인간을 근반으로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익숙하지만, 그에 따른 고충과 눈치가 따라오며 등이 굽는 여느 인간을 묘사하죠.
(1-P.7) “왜 돌아가려고 하세요. 여기서 용사가 돼서 인생역전을 꿈꾸세요.”
(1-P.58) “내가 볼 때 당신은 포장을 잘 하니 포장용사로 가세요.”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용사’로서 내딛는 첫 걸음 또한 이런 ‘중년’의 고충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인생역전’을 노리라는 달콤한 발림으로 그를 유혹하지만, 막상 그는 학원에서 강제로 정해준 ‘포장용사’라는 엉뚱한 직종에 묶이게 됩니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다는 느낌은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밖에 선택할 것이 없는 비루한 능력치를 보여준다고 해석됩니다.
(2-P.116) 그는 붉은 머리 참전용사 앞에 있는 귀리죽에 물을 붓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걸 먹고 포장해 봐.”
(2-P.117) 택시 일을 하면서도 겪었다. 네가 그렇게 운전을 잘 하냐며, 내게 눈 감고주차를 해보라던 그 녀석의 눈초리를.
당장 용사로서 겪는 첫 시련 또한 누군가의 비하로부터 시작됩니다. 강제로 맛없는 죽을 먹게 되고, 그를 ‘맛있다’라고 포장해야만 하는 그의 처지를 곱씹어보면, ‘인생역전’이라고 표현했던 용사의 인생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느낌뿐입니다.
(3-P.59) “이세계에서 만난 사람 중 제일 잘 생기셨습니다. 폐하 정말 따봉!”
(3-P.68) “근데 이세계에서 처음 본 사람이 바로 왕 당신입니다.”
용사로서 받는 교육도 쓴맛이 돌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체로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으로 끌려가, 그의 추한 외모를 칭찬하는 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3-P.109) “훌륭했습니다. 처음 하는 것치곤 잘 하시더군요.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는 그런 멘트 아주 좋았습니다. …(중간생략)… 맹목적인 칭찬 보단 탄산처럼 톡 쏘는 그런 맛이 있어 스트레스가 풀렸습니다.”
주인공이 그런 ‘포장’에 능숙하다는 것도 마냥 달가운 일로 보이진 않습니다. 애초에 주인공은 ‘용사가 된다’는 것에 작은 기대감을 품고 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용사’의 기본이고, 그것이 아부라는 이름의 ‘포장’이라는 것은 그가 바라던 ‘용사’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익숙한 여느 ‘중년남자’의 모습이겠죠.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세계’로 가서 용사가 된다는 모험담이 주는 힘은 ‘탈출’에서 비롯됩니다. 고난으로부터의 탈출, 현실로부터의 탈출, 무력한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그런 탈출의 종착지로 제시되는 것이 그 누구도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 ‘이세계’라는 것부터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탈출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반증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분명 ‘포장’은 주인공의 재능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천적인 재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오랜 사회생활로 몸에 익은 감각에 가깝습니다. 비록 그는 ‘이세계’라는 탈출구를 찾았음에도, 그 감각에 의존하며 세상을 헤쳐 나갑니다. 또 다른 세상에서마저 그 감각으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자면, 현실의 여느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 자신 혹은 가까운 누군가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누군가에게 ‘용사’가 될 수 있다는 유아적인 꿈은 너무 멀다고 느껴집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사회를 버티고 있는 누군가는 ‘용사’가 될 수 없는 바탕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무거운 주제를 그려보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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