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택신도라는 단어는 풀어서 말하자면 집을 신으로 모시는 토속 신앙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神은 종교의 대상으로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귀신도 신이라는 것이죠. 이 지점이 미묘하게 전복 되면서 가택신도는 신화라는 개념보다는 전기의 영역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특히 인간을 재제로 하여 그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친했지만, 어느덧 교류가 거의 끊겼던 친구에게서 6년 만에 전화가 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오빠가 이상하다고, 그의 상태를 살펴 달라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유혁이 손수 죽여 신으로 만든 그의 가족들을 발견하고, 주인공 역시 유혁에 의해 신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유혁의 공간은 비일상적인 공간이자 신들의 거주 공간입니다. 그렇게 신성하고도 일상과 다른 규범이 존재하는 곳이기에, 일상적인 공간에 있던 주인공은 마음대로 이 곳에 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이 공간으로 이미 신이 된 유정의 ‘초대’를 받아 비일상의 세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유혁이 직접 전화한 것이 아닌 유정이 전화를 건 부분입니다. 유혁은 어디까지나 신에게 봉사하는 제사장이자 신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 속 호혜적인 인물이기는 하나, 주인으로써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신의 존재가 된 유정이 초대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일상 세계의 주민으로 낙점 지어진 주인공은, 이 비일상의 세계 속에서 또 하나의 신이 될 채비를 합니다. 그렇게 유정으로 부터 물의 세례를 받아 티끌을 씻기고 피를 제물로 삼아 신으로 봉해집니다. 앞선 초대와 더불어 정화 의식을 주관하는 것 역시 유정이 진행하는 것은 의미심장 합니다. 유혁이 이를 안내하기는 하나, 신의 주인이 아님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 재물이자 신이 된 주인공은 이 호혜성의 세계에 진입하여 유혁에게 한없이 자비롭게 축복을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에게 일반적으로 공포 소설에서 등장하는 금기의 위반이나 전복성이 없다는 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정완에게 없다는 거지, 소설 전체적으로 없는 건 아닙니다. 바로 유혁 자체가 금기를 위반한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본래 죽어있어야 했던 인물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위반적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신을 모실 수 밖에 없는 유혁의 운명을 환기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의 공포스러운 점은 주인공이 겪게 된 지배하지 못한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불안과 위협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는 비일상의 세계를 통하여 신적인 존재로 승화 되었으니까요. 마치 신화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이 전기로써 유효한 까닭은 진정한 주인공은 유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완의 시점에서 관찰된 부분으로는 이 소설의 도입부는 끈끈하고 음습한 듯 보이면서도 끝에 이르러선 한없이 자애롭고 따사롭습니다. 그래서 끔찍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가페 적으로 시혜적인 공포를 관찰할 따름입니다. 이 지점에서 유혁의 광기로 넘어가서는 그의 살아남기 위한 공포가 엿보입니다. 그에게 정완의 과학적 논리가 통하지 않는 까닭은, 그는 이미 금기를 어기고 위반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혁이 금기를 어긴 것은 그의 자유의지일까요? 그리고 어떤 금기를 범했기에 살면 안되는 인간이 된 것일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자유 의지로써 ‘신을 섬긴다’는 것은 일종의 헌납이자 금기의 재생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신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수제로 만들어진 전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