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적 옴니버스를 통해 분석한 폭력의 대물림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아동학대의 대물림을 주장하다 (작가: 새벽놀, 작품정보)
리뷰어: 냉동쌀, 21년 5월, 조회 66

어떤 소설을 읽을지 선택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하시나요?

각자의 고려사항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브릿G라는 플랫폼에 특성상 장르를 먼저 보시는 분도 계실 수 있고, 시간에 쫓겨 잠깐 소설을 읽을 짬이 난 분들은 분량을 고려하실 수도 있겠죠. 그 외에도 독특한 제목을 통해 작품을 선택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제목의 중요성이란 그렇기 때문에 저를 포함한 몇몇 분들을 괴롭히는 것이겠지요. 또, 좋아하는 작가를 구독해두고 그 작가의 작품만 계속 읽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위의 예시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소설’을 찾아 헤매고 있는 여행자라는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마을 안에서 각자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분명 소설이라는 마을에 속해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생경한 풍경에 마음을 놓게 하는, 그런 미지의 장소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괜스레 있는 멋 없는 멋 다 부려가며 미사여구로 장식을 했지만, 알맹이는 이것입니다. 참신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편이지만 사실 다섯 편입니다. 다섯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사실 네 편 + 한 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5는, 시선에 따라 소설이 아닌 문학장르로 보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결국 한 편입니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들의 주제는 모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팔과 다리, 눈과 배꼽 등 신체 부위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서로 다른 기능을 하지만, 결국 이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장르를 옴니버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옴니버스 자체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웹툰, 영화 등에서 숱하게 사용된 방식이고, 역사가 깊은 소설에서는 피카레스크 형식이라는 하위 장르로도 존재하지요. 이 옴니버스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들어 있습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고등학생 때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지만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공부를 비롯한 여러가지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기 때문인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소설의 형식을, 이 작품은 분명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술자가 인물의 감정과 행동, 상태 등을 서술하고, 인물은 서술자의 명령에 따라 대사를 합니다. 소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형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작품에선, 혹자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을 둘러싼 사건 없이, 등장인물들은 아동학대의 되물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로 대화만 나눌 뿐입니다.

뉴스를 보고서, 학교 회의장에서, 상담을 받으며……. 등장인물들은 그저 아동학대의 되물림이 사실인지,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다 싶으면,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다음 단편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여 또 다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이성적으로……. 분명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소설보다는 서기가 작성한 회의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서술자가 바로 그 서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각주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의 각주라면 독자가 알아 두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렵거나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뜻이나, 작품이 쓰여진 당시의 사상, 유행이나 작가의 개인적인 철학을 통한 해설이 편집자주로 달려있거나 하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가 분께서 소개란에 미리 당부하셨듯, 그 각주들은 모두 인용의 출처입니다. 소설은커녕 논문 등의 레퍼런스로 자주 접할 수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더 접하기 쉬운 매체라면 위키피디아도 있을 수 있고요. 어느 쪽이든 소설과는 거리가 먼 매체이고, 따라서 이 작품을 이질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소설인듯 소설이 아닌 작품과 함께 쭈욱 내려가다보면, #4에 이르러 점점 전위적으로 변모합니다. 사건을 없앤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인물의 대사마저 봉인해버립니다. 또한 이때부터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듯, 현제형 시제로 서술이 바뀌면서 점점 기묘해집니다. 이 기묘함의 끝은 #5에 이르러 절정을 맺습니다. 이젠 서술자마저 사라져버립니다. 서술자가 사라졌지만, 대화는 계속됩니다. #5는 오직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희곡이나 시나리오에서 보였을 지시문조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형식 부문에서 상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그것도 20000자 내외의 단편소설에 집약적으로 실행하였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형식만을 다루었는데도 꽤 분량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이 소설의 주제를 생각하면 형식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동학대의 되물림. 언제부터인가 자주 들려왔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아동학대를 당한 사람은 커서 똑같이 아동학대를 되물림하거나, 더 심한 범죄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론 내지는 가설입니다. 제가 간단히 아는 건 이 정도이고, 상술한 것처럼 상당한 출처 인용을 통한 자료조사가 삽입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더욱 자세히 알아가실 수 있습니다.

폭력의 끊임없는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쉽사리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 제시되었듯이, 슬럼가 등 빈민 계층에서 아동학대가 발생할 확률도 높고, 그와 별개로 범죄가 발생할 확률도 높다는, 환경적인 요인을 제시하여 반박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사례가 더 떠오르지만 작품 내에 제시한 것과 동일하거나 더 질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군요.

이 작품은 등장인물 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삭막하고 때때로 하드보일드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조소, 조롱, 과장, 선동, 냉철한 해석, 이성적인 결론 등, 분명 한없이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 아동학대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작품의 전체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심지어 #2의 교내 회의에서 강한 어조와 과장된 말투로 선동을 하는 학생마저도, 회장의 조소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를 읽는 독자 또한 따라서 차분해질 수 밖에 없으며, 주제에 대해 더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내용을 따라가게 합니다. 아동학대의 되물림 현상이 실존하는가?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있는가? 만약 실존한다면, 이것은 가해자의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논리가 아닌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난립하지만 독자의 머릿속에 차분히 정리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면서도, 차갑기 때문에 객관적인 서술자는 어떠한 입장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가만히 서술하며 관조합니다. 분명 작가 분도 사람인 이상 둘 다 동등하게 지지하지는 않을 것인데, 서술자로서 등장할 때는 극도의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토론회 등에 참석할 때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한데, 부끄럽게도 저는 쉽게 한쪽으로 쏠리게 되고, 이는 몇몇 분들도 공감하는 사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감함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이 작품은 매우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과서적이란 전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에게 소개되어도 될 정도라는 의미입니다. 교육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의견의 다양성, 형식의 다양성, 그러나 그것을 서술하면서도 흠 없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태도는 많은 분들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소설은 반드시 배경, 인사, 사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사건에 휘말리고 이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서사가 소설의 근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선한 충격을 원하시는 독자 분들께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전통적인 소설의 재미를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는 아쉬운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사소하지만 꼭 언급해야겠다고 정해놓은 점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상술하였듯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차갑고 삭막합니다. 끝에 가서 해체된 구조를 보면 더욱 그렇죠. 특히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은 이름이 없습니다. 선배, 선객 등의 일반명사로 지칭하는 것을 넘어 아예 알파벳으로 표기해버림으로써, 딱딱한 분위기를 극도로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잘못 썼군요. 왜냐하면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3에서 이름을 가진 학생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차갑게, 자신의 해석대로, 자신의 이익을 따라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주장할 때, 유일하게 스스로를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에 내재된 폭력성을 경계하며, 도움을 찾고자 하는 학생입니다. 하늘이는 학대의 피해자입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작품 속에서 피해자를 다루는 아주 따뜻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학대를 다루는 작품으로서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접근해서는 안 될 부분이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인데, 그것을 완벽하게 처리해낸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방향으로 머리가 열리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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