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 작가의 호러 소설 <죽은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 는 어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을 거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상위 교과과정으로 올라갈수록 학교에서 하루 중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학생들과 제일 많이 부대끼며 생활하게 된다. 사람이 3명만 모여도 위계질서가 생긴다는 말이 있는데, 배움의 장이라 불리는 학교라 해서 예외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한 반을 살펴보면 성적, 부모의 사회적 위치, 학생 본인이 가진 재능이나 소위 말하는 ‘끼’에 따라 무리가 형성되고, 나름의 생태계가 조성된다.
이 이야기는 은영의 복수극이다. 은영은 교실 생태계에서 군림하는 성원, 영운, 지헌, 진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삥’도 뜯기며 학교생활을 한다. 그러다 끝내는 성폭행을 당하고, 그 과정이 영상으로 박제되기까지 한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은영은 복수를 결심한다.
옥상에서 추락사한 진희를 시작으로 진희의 영혼을 지상에 묶어놓고 저주하며, 성원, 영운, 지헌에게 헛것을 보여주어 죽음으로 이끈다. 그러나 진희의 죽음을 자살로 덮어버리며 세 깡패들과 한 배를 탄 것처럼 위장했기에 성원, 영운, 지헌은 아무것도 모르고 은영에게 의지한다. 왜? 은영이 귀신을 보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들을 위협하는 괴현상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주 뻔뻔하고 이기적이지만, 애초에 그런 놈들이 아니었으면 은영을 괴롭히지도 않았을 터다.
은영은 이 상황을 교묘하게 조종해가며 세 명을 차례차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자기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던 악마들의 목숨줄을 손아귀에 넣고 이리저리 재어 볼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결국 그들은 죽음으로써 은영을 괴롭혔던 댓가를 치렀다.
또한 죽은 진희의 어머니, 문씨가 있다. 문씨는 진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학교폭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은영의 귀띔에 문씨는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 어쩌다 만나게 된 무당인 미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문씨는 인형을 애지중지하며 진희가 살아돌아왔다 여기며 곁에 두고, 끝내는 가해자인 성원을 살해한다. 은영은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깔끔하게 복수를 했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었지 않을까.
게다가 은영은 자기가 성폭행을 당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진희의 어머니 문씨에게도 복수를 함으로써 자기를 괴롭히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다. 마냥 착한 줄만 알았던 딸이 학교폭력의 가해자고, 딸이 당한 모든 고통을 겪은 당사자가 은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문씨가 받은 충격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버금갔을 것이다. 깔끔하게 죽이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복수일 때가 있는데, 바로 문씨의 경우가 그렇다고 하겠다.
은영은 감호소에 있는 거울의 구석에 그간 모아온 진희와 성원, 영운, 지헌의 영혼을 부적으로 묶어버려 평생을 성불할 수도 없게 만들어 자기의 복수를 완료했다. 감호소에서 모든 걸 털어버리고 엄마인 미애한테로 달려가는 은영의 뒷모습이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자기를 괴롭혔던 일진들에게 복수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은영은 자신이 순순히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해자들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은영은 공식적인 절차에 학교폭력을 호소하는 대신 본인이 직접 해결했다. 공식적인 기관에서는 해결할 의지가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스스로를 구제할 수밖에. 선생들은 일을 키우기 싫어 그저 쉬쉬하기만 하고, 학우들은 깡패들의 협박과 폭력이 무서워 은영을 도와줄 수가 없다. 그러면 자력구제 말고는 다른 방편이 없지. 은영의 사적복수를 보면 돈받고 방과 후 ‘삼촌’역할을 해준다는 용역업체의 기사가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현실에는 그것도 불가능한 수많은 은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그나마 은영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력구제에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약간이라도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학교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옛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다. 약자가 언제까지나 약자로만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강자의 오만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말이지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착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