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소설의 중후반부를 읽을 때 까지만 해도 이 리뷰의 제목으로 ‘스토커의 갈라테이아’를 쓰려 했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사는 짐짓 일목요연하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똑같다.”는 서술자의 첫 마디는 뒤이을 구구절절한 일들을 변명하는 것 같다. ‘이건 <오페라의 유령> 속 에릭과 크리스틴이 써 내린 비극의 변주다. 예술가(대대로 남성이었고 이 작품서도 남성이다.)가 누군가(유서 깊을 정도로 대부분 여성이었고 물론 이 작품서도 여성이다.)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예술가에게 동전의 양면 같은 영감과 광기를 불어넣을 거다. 걸작이 탄생할 거고 범죄가 일어날 거다.’ 여느 치정극이 그러하듯 이 이야기도 전형적이지만 재미있을 거다. 한 명 이상의 삶이 파탄 날 게 보장되니까. 남 인생 말아먹은 이야기만큼 구미 당기는 스낵이 또 뭐가 있을까.
스토커는 참…… 독자가 사랑하기 어려운 인물 유형이다. 세상에 역겹지 않은 범죄가 뭐가 있겠냐마는, 스토킹은 행위자가 그 놈의 짝사랑을 하는 탓에 유독 골치 아프다. 다른 모든 로맨스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기에, 아무도 스토커가 언제부터 그 모양 그 꼴이 되는지 칼같이 가를 수 없다. 남들이 저게 연애로 이어질 지 범죄로 이어질 지 긴가민가하는 사이 자신의 죄책감을 누를 면죄부를 하나하나 착실히 마련한 스토커는 그 견고한 자기합리를 토대 삼아 지리멸렬하게 왜곡된 ‘완성된 사랑’을 애정하는 대상에게 강압적으로 들이밀기 시작한다. 그때 가서 피해자가 댁은 지금 나에게 유해하다고 아무리 지적한들, 스토커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 있으니까.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완전무결한 사랑을 하는 망상 속 자신과 현실의 일체화 뿐이니까.
스토커의 사고회로는 일방적 사랑의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걸 보는 이에게 ‘내가 언젠가 했던 짝사랑도 이렇게 추악한 꼴이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불어넣는다. 내 로맨스와 남의 범죄의 유사성이 자아내는 동질감. 나도 저 악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불쾌감. 스토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작가는 이 낯익은 두려움을 컨트롤해야 한다. 로맨스 장르라면 이건 반드시 보답 받을 사랑이며 그러므로 범죄도 아니라는 확신을, 호러와 스릴러라면 얘는 태생부터 범죄자가 되기로 운명 지어졌으니 부디 이입하지 말고 적당히 선을 그으라는 경고를 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용우가 100일 간 범인에서 범죄자로 여물어가는 단계를 묘사하는 데 2막을 바친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쯤 했으면 멈춰야 하지 않냐는 불안감에도 차마 주인공을 버리지 않고 다음날, 또 그 다음날 행보를 쫓도록 만드는 건 적재적소에서 드러나는 용우의 내적 갈등이다. 조금 더 정확히 진단하면 그녀를 사랑한다는 일관된 외침을 뚫고 간간히 터지는, 자신은 변태이자 스토커일 뿐이며 지금 하는 행동은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용우의 양심고백이다. 갱생의 여지가 엿보이는, 아직 사람의 탈을 벗지 않은 캐릭터를 별종 괴물로 매도할 수 있는 인간은 몇 없다. 그가 사랑을 하는 주인공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복잡한 캐릭터를 조형할 역량을 갖춘 작가라면 그가 풀어낼 뒷이야기에 더 기대를 걸어봐도 좋다.
독자의 눈에 가장 가장 두드러지게 포착되는 용우의 페르소나가 스토커라면, 작품 내 인물들에게 1차적으로 보여지는 그의 정체성은 예술가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영감을 바라고, 영감을 주는 뮤즈를 바라는 예술가의 모습은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목을 매는 애정결핍 환자와 통하는 면이 있지만, 그 사랑이 타인을 향하지 않고 자기애로 귀결된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예술가는 뮤즈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뮤즈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 방향성을 잃은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 붇는다. 이건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로망스다. 예술가 이용우에게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여러 작품들 속 이상적 여성상의 현현이자, 그의 작품을 태어나게 하는 영감의 모태이자, 용우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완성하는 고고한 레이디다.
용우가 가진 이 두 마인드는 다분히 문제적이다. 스토커 용우가 바라는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하는 그녀와 예술가 용우가 바라는 결코 내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그녀는 현실에 있는 한 사람에서 파생된 그림자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닌 것을 두고 포기하니 마니 여부를 따지는 게 같잖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는 모순되는 두 욕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아이러니에서 벗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만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초반에 용우는 스토커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그것도 꽤나 건전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그는 그녀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그녀와 가까워지고, 긍정적인 관계를 쌓아 나간다. 용기를 갖고 양지에 나선 스토커는 범죄자가 아니다. 대화 종종 그녀가 보이는 의외의 태도는 용우를 당황하게 만들고 언젠가는 그녀가 용우가 머릿속에 그리던 르누아르의 소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지만, 이 루트는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현실로 인해 용우의 욕망은 다시 음지로 내쳐진다. 용우는 철형과 함께 있는 그녀가 더는 모딜리아니의 여인이 아니라고 좌절하지만, 이건 바로잡고 가자. 용우는 그제서야 그녀가 모딜리아니의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과 직면한 거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용우는 다시금 자신이 품은 욕망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 지 선택해야 한다. 감히 굳건한 환상을 깨고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랑을 벌할 지, 내 사랑을 감히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현실을 벌할 지. 용우의 답은 이 소설의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그녀는 처음부터 용우의 ‘별’이었고, 용우는 자신의 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다. 한낱 스토커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택을 통해 비로소 내적 갈등을 봉합한 용우는 자신의 뮤즈를 지킨 한 명의 기사로, 그리고 현실의 모든 시련에서 벗어난 그녀는 용우만의 갈라테이아로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 하고 마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스토커가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장르적 전개를 따른다. 하지만 이 리뷰는 <나르시스트들의 갈라테이아>다. 이 소설에는 눈여겨봐야 할 숨겨진 주인공이 한 명 더 있다. 사실, 눈썰미가 예리한 독자라면 그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챘으리라.
기연(앞서 계속 설명한, 용우가 죽고 못 사는 그의 별)은 그림 모델에 응했던 그 한 번을 제외하면 용우에게 절대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클리셰에 익숙한 사람은 여기서부터 그에게 위화감을 느낀다. 기연의 행보는 그를 끊임없이 대상화, 타자화 하려는 용우의 시선과 불화한다. 비록 용우는 본인의 지독한 오만과 자기애 탓에 자신의 그녀가 뮤즈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예술과 사랑에 대한 고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채지만(다만 마지막 부분을 의심이나마 할 줄 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서 있던 독자들의 눈엔 기연의 본모습이 보인다. 기연은 능동적 사랑을 한다. 또 용우에게 맞서며 불협화음을 만들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의 드러난 주인공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존재다. 당장 떠오르는 대중문화 속 캐릭터 중 기연과 가장 닮은 이는 에이미(<나를 찾아줘>, 2014, 데이빗 핀처 作)다. 작중의 남자들은 기연의 권력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마음껏 그녀를 저가 보고픈 대로 본다. 그리고 기연은 남성들의 이러한 시혜적 태도를 본인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오직 그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이들이 자기 머릿속의 그녀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희생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팜므파탈’이라고 밝혔지만, 팜므파탈이 뭐 별 건가. 지들이 고래인 줄 아는 남자들이 그 비대한 자의식으로 박 터지게 싸우는 틈바구니에 휩쓸려 죽지 않고 자기 보신을 해내는 여자들에게 씌워지는 색안경 아닌가. 나를 저들의 소유물 취급하는 나르시스트들에게 나도 당신과 똑같은 족속이라는 걸 알려주는 기연의 고백은 그 고백을 듣는 당사자에겐 공포스럽기 짝이 없겠지만(아마 피그말리온이 자기가 조각한 갈라테이아가 다른 사람이 좋다며 가출해버리는 걸 볼 때와 비슷한 충격이지 않을까.) 내심 이런 걸 기대하던 관객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두 명의 나르시스트들이 상대를 객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벌이는 암투극이다. 그리고 우리 이용우씨는 그 싸움에서 진다. 그의 패배는 당연한 순리로 느껴질 만큼 깔끔하다. 결과를 인정하고 그녀가 더 이상 그녀가 아니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용우의 모습은 작가가 밝힌 이 작품의 원본 시나리오 집필 시점에선 신선했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한동안은 꽤 재미있는 장르적 비틀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