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질지언정 잠들지 않는 한 세계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카밀라를 위하여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글 쓰는 빗물, 21년 4월, 조회 83

영화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는, 요정 모양을 한 아버지의 정원장식품을 몰래 빼돌려 세계 여행하는 친구에게 건넨다. 그리고 친구가 여행지를 배경으로 찍은 인형 사진을 아버지 앞에 익명의 우편물로 보낸다.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서다. 어린 날 어머니를 잃고 홈스쿨링을 하며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온 아멜리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타자와 상호작용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일의 기쁨을 천천히 배워나간다. 그런 아멜리의 마음에 어느 날 질문이 떠오른 것이다. 온 세상에 사랑을 베풀어도 끝내 아버지와는 그것을 나누지 못한다면, 나중에 얼마나 눈물을 흘릴 것인가. 그래서 아멜리는, 아버지가 전리품으로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했던 인형에게 사랑스럽고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비밀스러운 임무처럼 수행해낸다. 그리고 끝내, 아멜리 자신의 행복까지 찾아내고야 만다.

 

여기 또 하나의 외로운 소녀가 있다. 서계수 작가의 <카밀라를 위하여>에는, 우수한 학업성적이라는 나름의 무기로 버티고는 있으나 자신이 속한 모든 세계와 어긋남을 경험하는 진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진서는, 삐걱대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세미를 만난다. 진서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술 속에서 세미의 세계는 진서의 그것처럼 자세히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세미 역시 세미의 모양대로 세계와의 부대낌을 겪는 아이라는 것을. 각자의 성안에서 홀로 춤추던 두 아이는 진서의 세계 속 영화 주인공 ‘카밀라’와 세미의 세계 속 공주 같은 인형의 만남을 계기로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선다. 이제 진서가 좋아하는 영화 속 카밀라를 세미도 알며, 세미의 인형에게는 진서가 붙여준 카밀라라는 이름이 생겼다.

 

함께 하는 일에 서툰 두 소녀가 서로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제 세상에 돋친 가시를 감당하기에 벅찬 진서의 마음은 끝내 세미를 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세미가 떠난 후, 진서는 세미가 남기고 간 그들의 카밀라의 목을 꺾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카밀라는 영원할 것이지만 나는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한 시절 두 소녀의 이야기와 교감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박살 난 것인지 확인할 수도 없고, 조금의 출혈을 남긴 채로. 진서의 성 아래 갇힌 표범은 그것을 다시 제물 삼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물리적으로 부서졌어도 영원히 감기지 않는 눈빛으로 남은 카밀라의 존재다.

 

나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를 만나게 하려는 시도는 자주 처절히 실패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그런 시도를 한다. <아멜리에>속 아멜리처럼, 그리고 <카밀라를 위하여>의 진서처럼. 그런 시기쯤은 금세 지나간다는 어른들의 무신경한 위로에 지쳤을 진서에게 당장은 건네기 어려운 말이지만, 앞으로 살아갈 진서의 삶에 얼마나 많은 카밀라가 찾아올지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다음에 찾아올 카밀라는 어쩌면 이번 카밀라보다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영원히 잠들지 않은 한 시절 속에 남은 진서와 세미의 카밀라가 그들의 다음 여정과 만남에 수호신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카밀라를 닮은 인형을 꼭 끌어안고서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떠나고 새로운 세계와 사랑을 주고받는 작은 기적이 진서에게도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이애나비의 죽음을 다룬 뉴스를 멍하니 시청하던 아멜리는, 작은 우연으로 인해 오래전 자신의 거주지에 살았던 한 소년의 보물상자를 발견한다. 아멜리에게 그 발견은 투탕카멘의 유적지를 발굴한 것보다 거대한 사건이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전환점이다. 보물상자의 주인을 찾아준 일을 계기로 아멜리는 낯모르는 타인의 행복, 자신에게 소중한 이의 행복,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을 찾는 일의 기쁨을 차례로 찾아간다. 환하게 웃는 아멜리의 모습을 스크린 너머로 보다 보면, 마음 가득히 기쁨이 차오른다. 외롭고 슬펐던 아멜리의 삶이 결국 위로받고, 그 위로의 주체가 아멜리 자신이라는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다른 누구도 아닌 진서를 위해 바라본다. 진서의 작고 거대한 세계에 누군가 찾아오고 진서가 누군가를 찾아가는 날이 머잖아 오기를. 진서가 외로움보다 행복을 더 많이 세어보는 날이 오기를. 아주 작고 흔해서 엄청난 기적이, 진서의 세계에 생겨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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