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캡틴> 상/하 –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집단의 침묵 강요, 더 이상 따르지 않겠어!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어 캡틴 – 하 (작가: 쐐기벌레, 작품정보)
리뷰어: 그림니르, 21년 4월, 조회 114

오랜만에 진심으로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진 작품을 읽었다.

 

 

초반부에 배경 설명이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별 하나를 깎지 않았을 것이다. 나야 조금만 읽고도 제2차 세계대전(이하 2차대전)을 배경으로 창작한 소설이란 걸 알았지만, 2차대전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소설이 어떤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몰라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거나, 작품의 울림을 많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내 짧은 견해로는 이 작품이 실제 역사와 국가 명칭, 지명 그대로를 반영했다면 독자들이 이해하기 좀 더 쉬웠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점 말고는 전부 다 좋았다.

 

 

우선, 나는 이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아직 시청하지 않았지만 작품 이해에 어려움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읽으면서 내가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는 환상까지 느낄 정도로 작품에 빠져들어갔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놀라울 정도로 능숙하게 풀어 나가는 작가의 능력 덕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윌로엘름(약칭 윌름)’은 주변 상황 때문에 전쟁에 빠져들어 가해자의 위치에 섰지만, 조국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일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최후반부 마지막 문장 이전까지 그는 강요에 맞설 힘을 내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행한다. 윌름과 같은 유형의 주인공은 독자들로부터 ‘고구마 답답이’ 줄여서 ‘고답’이라는 평가를 듣기 쉽고, 실제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잘 되지 않았다면 그런 평가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쐐기벌레 작가는 오로지 묘사만으로 윌름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 환멸감을 느끼는 심리, 그러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까닭, 그리고 마지막 최후반부에 자신의 행동에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는 심적 배경까지 나타냈다. 그래서 독자 입장에선 윌름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를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그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기까지 할 수 있다.

 

 

물론 윌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까지 몇 가지 사건들이 전개되었긴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작품 속 전쟁에는 윌름과 같은 상황에 처한 수많은 군인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집단의 무거운 침묵이 주는 두려움에 굴복하여 그처럼 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윌름의 변화 동력은 어디까지나 그의 내부에 있었다고 해야 타당하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칭찬하고 싶은 점은 단순한 구성의 장점을 살려 명료성을 최대한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쐐기벌레 작가의 기량이 예사롭지 않다는 징조다. 단순한 구성의 작품은 보통 작품의 어느 지점에서 봐도 남은 전개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나 시청자가 작품에 품는 기대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침 시간에 방송해 주는 드라마는 그날 처음 봐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게 된다. 하지만 쐐기벌레 작가는 단순한 구성의 단점을 바다처럼 거대한 필력과 독자의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묘사로 지워 버리고, 그 장점인 명료성만 남겼다. 이 작품의 명료성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윌름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킨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윌름은 과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전쟁에 징집되었는데, 그가 담임을 맡던 초등학생 중에는 부모의 무관심과 같은 반 아이들의 폭력에 시달리던 ‘모나’란 소녀가 있었다. 윌름은 모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그의 편이 되지만, 결국은 학부모와 교장의 압력에 굴복해서 모나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그 결과 모나는 교실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작품 속에는 모나가 정확히 어찌되었는지 나오지 않지만 아마 죽었거나 굉장히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현재의 윌름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점령지역의 현지인 ‘요아힘’과 ‘레옹’이 윌름이 속한 나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전부터 그들에 대한 탄압은 있어 왔던 모양이지만, 윌름네 나라의 강력해진 민족주의 때문에 요아힘과 레옹 등은 생존권은 물론 아예 인권 그 자체를 박탈당한다. 윌름은 동물처럼 트럭에 실려 수용소로 가던 레옹을 구해냈지만 반군 활동을 하다 잡혀온 요아힘을 구할 방법을 찾진 못한다. 오히려 그는 요아힘을 심문해야 하는 입장이고, 그런 자기 입장에 충실하게 행동하기까지 한다. 물론 윌름은 그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지만, 예전에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군대라는 집단의 압력에 순응하다 보면 결국 요아힘을 구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임을 떠넘기려는 상관들에 의해 대위로 억지 승진하기까지 한 윌름에겐 두 가지 선택만 남아 있다. 하나는 침묵만큼이나 무거운 집단의 압력에 반항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모나에게 그랬듯 요아힘과 레옹에게도 가해자가 되는 선택이다. 이 선택은 윌름에게도 그렇지만 지켜보는 독자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데, 다행히 또 다른 선택이 존재한다. 집단이 강요하는 침묵에 더 이상 따르지 않는 것이다.

 

 

윌름은 두 번째 선택을 한다. 나도 그렇지만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윌름이 선택한 길이 옳고 누구나 윌름처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윌름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몇 명이나 윌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도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글을 맺으면서 말하자면, 이 작품은 정말 좋은 작품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다 갖추었다. 빛나는 필력, 명료한 구성, 생각할 거리까지. 이제 내일이 벌써 토요일이니 주말을 즐기며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쐐기벌레 작가가 항상 건강해서 이런 좋은 작품들을 더 많이 써 주었으면 좋겠다. 모쪼록 쐐기벌레 작가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빈다.

 

 

뱀발

+1. 등장인물의 이름 중에 내게 굉장히 익숙한 이름들인 ‘아냐’, ‘롤렉’, ‘리슈’가 보여서 ‘쐐기벌레 작가도 나랑 같은 책을 읽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모두 아트 슈피겔만의 그래픽 노블 <쥐>에 나오는 등장인물 겸 실존인물의 이름들이다.

+2. 주인공의 이름 ‘윌름’을 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윌렘 데포(Willem Dafoe, 1955~생존 중) 형님이 생각났다. 윌렘 데포 배우님은 출연작 고르는 눈이 정말 명료하고 탁월한 분이니 이 작품만큼 좋은 영화들에 자주 출연하시리라 믿는다. 이 형님의 영화 중에 1988년작 <예수의 마지막 유혹>, 2018년작 <고흐, 영원의 문에서>와 2019년작 <라이트하우스>는 작품성이 빼어난 영화로 이미 입소문이 났다.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이 리뷰를 보실 모든 분들이 윌렘 형님의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한 조각 사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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