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오픈월드 RPG의 시나리오를 연상케 하는 서사입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새벽’을 초점으로 삼아 전개되고, 여기에 일행이 한 명씩 합류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완결된 도입부의 제목 ‘별꽃 원정대’는 이 일행의 이름이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별꽃 원정대의 탄생 배경’이 되는 셈이죠.
플롯이 나뉘지 않고 시간 순서에 따라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죽 이어집니다. 자연히 몰입도는 높아지는데 한편으로는 자칫 서사가 처질 우려도 있어 보입니다. 거칠게 도식화해보자면 이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건 새벽에게 닥치는 위기와 그로부터의 탈출―또는 극복―이라는 과정의 반복인데, 그 안에서 단순히 사건의 강도나 스펙터클에 차이를 주는 것만으로는 고조되는 서스펜스를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다수 필요해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쓰려고 넣어둔 요소도 군데군데 보입니다. 예컨대 ‘발김쟁이’의 서슬에 상처 입은 새벽의 손이 지닌 능력, 새벽이 ‘사시랑이’와의 싸움에서 입은 허벅지의 상처 같은 것들이 그렇죠. 매품팔이로 푼돈을 벌던 새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리적 타격에 대한 모종의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게 됩니다. 새벽 외에도 인물 각각의 능력과 사연, 그리고 이들이 모여서 내는 시너지에 얼마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입히는가에 따라 앞으로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서술 방식에서도 충분히 차별화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한국형’ 오픈월드 RPG 느낌이 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히 인물과 공간의 명명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보다 작가가 구사하는 문장 자체에 한국어의 결이 잘 배어 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 결이란 게 정확히 뭐냐고 하면 콕 집어서 표현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각별한 노력으로 문체를 다듬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9-10회쯤 가면 문장들이 1-2회 때만큼 팽팽하게 당긴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이건 제 주관적인 느낌이고, 그새 작가의 문체에 익숙해진 탓에 괜히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럼 이제 줄거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1회에 전형적인 싸움의 고수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 없이 ‘용사’라 불리고요. 위기에 처한 새벽을 어둠 속의 괴물 발김쟁이로부터 구해내며 존재감을 각인시키죠. 작품의 제목이 <무명용사전>이니까 이 용사의 이름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거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사연과 함께 소개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인공에게 ‘무명의 용사’라는 책임을 계승하는 식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쪽이든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용사 캐릭터가 꽤 전형적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입체적인 매력을 뽐내는 지점들도 있고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가장 궁금한 캐릭터가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용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물 빌드업이 아주 잘 된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죠.
발김쟁이 이후 새벽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괴물은 ‘째마리’입니다. 이때 새벽은 용사가 발김쟁이를 죽여서 얻은 무기인 ‘서슬’을 맨손으로 쥐게 됩니다. 서슬은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아니어서 이를 맨손으로 만진 새벽의 손은 검게 물들며 큰 손상을 입죠. 이후 새벽의 손을 치료하기 위한 여정에서 무당 ‘소소리’가 일행에 합류하게 됩니다. 소소리는 굿에서 ‘까마귀 황제의 샘 아래 깃털’을 찾으라는 서낭들의 전언을 듣고 새벽, 용사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일행은 까마귀 황제의 샘으로 여겨지는 우물에서 세 번째 괴물 사시랑이를 만나게 되죠. 새벽은 사시랑이에게 찔려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사시랑이는 용사에게 처치되어 검은 깃털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이후 서슬을 다듬어줄 솜씨 좋은 도깨비를 찾아가는 길에 넷째 일행 ‘해울치’를 만나며 별꽃 원정대가 꾸려집니다.
넷이 모여 처음으로 찾아간 고을의 이름은 ‘울목벌’입니다. 울목벌은 교통과 상업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번창한 곳입니다. 일행은 여기서 앞으로 필요한 여비를 벌기로 하고 각자 행동에 나서는데, 이때 새벽이 얻게 되는 일자리가 흥미롭습니다. ‘흥도’라는 기술자 노인이 자신이 만든 기계 장치―내부에 레버와 페달을 탑재한 커다란 전신 갑옷 장치―의 조작 실험에 협조하는 대가로 꽤 큰돈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실험 둘째 날에 새벽은 자신에게 매품팔이를 시켰던 살인자 ‘태화’를 만나게 되죠. 새벽은 그 자리에서 태화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한참을 얻어맞다가, 서슬을 쥐었던 손의 힘으로 태화에게 한 방 먹입니다. 분노한 태화가 새벽을 죽이려 하는 사이, 이무기 ‘사담 휘록’이 고을에 나타나 어수선해진 틈을 타 상황은 급하게 마무리되죠. 앞으로 흥도의 기계 장치가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그리고 새벽 일행과 태화, 사담 휘록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질지, 소재와 소품과 인물의 매력이 서사의 전개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끝으로 하나 더 이 작품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장점에 대해 언급하자면, 바로 클리프 행어입니다. 작가는 한 회를 끝낼 때 독자가 다음 회에 매달리게 만드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후에도 계속 새벽을 중심으로 시간 흐름을 따라 게임처럼 전개된다면, 이런 훈련된 작법이 갖는 중요성 또한 점점 커질 겁니다. 그게 아무리 진부하게 느껴지더라도요. 짐작하고 봐도 재밌는 건 재밌는 거거든요. 전 이 작품이 그런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켜줄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