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룬 행성의 최고 덕목은 책임감이다. 갈라룬인에게 TR-4 행성의 한 종족은 몹시 특이하게 보인다. 사실, 특이함을 넘어서 자신들의 상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TR-4 행성의 지배자였다고?
-갈라룬이 바라본 지구는 번호가 매겨진 행성일 뿐
갈라룬인은 갈라룬 행성에 사는 생명체가 유일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갈라룬 행성이 우주의 0.2%일 정도로 우주는 넓다. 넓은 우주에 갈라룬 행성만 생명체가 살고 있을리 없다.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존중해야 하며 차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기본 상식이다.
반대로, TR-4의 인간이라는 종족은 자신들이 유일한 생명체인 것처럼 군다. 우주가 넓고, 은하계가 여러 개 있다는 학설이 정설로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백과사전에 ‘지구’를 쳐보면 ‘유일하게 생물이 알려진 행성’이라고 되어 있다. 인간의 이론으로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갖춘 행성은 지구가 유일하다. 인간은 자신이 유일한 고등 지능 동물이라고 믿고 다른 동물을 착취한다. 오직 인간을 배부르게 먹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다.
위의 이야기는 갈라룬 행성의 연구원 제나의 말을 정리한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아름답다’는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는 종족은 오직 인간뿐이다. 진짜 인간인 내가 두 가지 대비되는 상황을 보았을 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말 지구를 착취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제나의 눈에 TR-4 행성은 이기심의 표본처럼 다루어진다. 그들만 드러내면 이 세계는 완전히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왜 읽는 내내 불편한 기분이 들까.
-1%의 언캐니
언캐니란 특정 기준 이상으로 비슷한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낯설로 두려운 감정을 뜻한다. 이 소설은 두 가지 결에서 언캐니함을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는 갈라룬인이 인간들을 보며 느끼는 언캐니함이고, 두 번째는 갈라룬인들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언캐니함이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이 소설을 보았을 때는 자신과 구별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원인인 것 같다. 실제로 인간과 갈라룬인은 매우 닮은 것처럼 묘사된다. 유전적으로 98.8% 일치하며, 유전자 검사를 해보아야만 인간인지 알 수 있다. (제나가 새뮤얼을 인간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위대한 갈라룬인”이라고 자부하는 제나에게, 그들과 쏙 빼닮은 인간이 가장 유약한 생명체로 몰락하는 과정은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1%다른 지점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 차이점이 바로 이기심이다. 그 종족적 특성으로 인해 인간은 멸망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월등하다고 생각하며, 행성의 수호자처럼 행동한다. 자연에 있는 것들을 취해서 자신에게 유용한 도구로 만드는 악랄함까지 보인다.
그러나, 정말 갈라룬인의 유전자에 인간의 이기심은 새겨지지 않은 걸까? 갈라룬인은 스스로가 가장 위대한 종족이라고 말하며, 지적 생물체와 그렇지 않은 생물체를 구분한다. 다른 생명체에게 “끔찍하고 험악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며 그들이 TR-4를 인간으로부터 구출해줄것처럼 군다. 또한 다른 행성 전체를 망원경의 지지대로 삼아 TR-4를 관측한다. 이처럼 인간의 특성과 유사한 모습을 보임에도, 그들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들은 ‘책임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책임감은 참 실체가 없고 부질없는 말처럼 느껴진다. 남은 1%는 이기심보다 더 교묘하고 악랄한 차별을 만들고 있다.
어쩌면 갈라룬인을 보며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은 우리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증명사진이 된 소설
증명사진은 보통 사진과 다르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자발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을 남기고 싶을 때이다. 반면, 증명사진은 타의로 내가 존재함을 ‘증명’해야 할 때 찍는 사진이다. 증명 사진은 내가 이 국가에 있어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불법체류자처럼) 증명사진으로 된 신분증이 없다면 차별을 받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가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우리의 사진을 더 아름답게 바꾸어도,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타인이 원하는 모습게 가깝다. 이처럼 증명사진 프로젝트란 절대 피사체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며, 때로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언캐니 미드나잇 쇼” 자체를 증명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쇼는 차별을 금기시하는 동시에 (진행자는 차별하는 말을 했다고 사막 한가운데 열흘 동안 방치되었다.) 차별을 드러낸다. 실제로 인간 50여 명이 남은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그들의 기준으로 인간 모두는 이기적이라고 여겨진다. 제나는 “지적 생물체가 아니면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하나하나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증명사진 프로젝트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피사체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된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매우 흡사하지만 1% 다른 점은 바로 그 이기심이며, 그 이기심 때문에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본보기로서 사용된다. 자신들은 그 이기심으로 절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누가 프로젝트를 승인할 수 있으며 어떤 말이 프로젝트를 합리화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 새뮤얼은 ‘인간’이라고 의심받고 처벌받는다. 그의 쇼 역시 ‘인간’적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의 도구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