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해의 큰 틀을 보자면
14세기 말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여인 나르바가 자신이 사랑했던 뱀파이어 남자 체르의 영생이 끝날 위기에 처하자
그의 남은 피를 마셔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어 그 남자가 인간으로 환생하기까지 500년을 기다리는 내용이다.
그 500년의 시간동안 나르바는
유럽의 온갖 도시를 떠돌며 살다가 어느 순간 청나라로 넘어와 살다가
신해혁명 직후 상하이에서 제물포로 넘어오면서
일제강점기 경성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존재인 뱀파이어 제논과 함께
인왕산 동굴에서 장의사로 위장해 살며
서대문 감옥에서 나온 조선인 시체들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의 총을 맞고 인왕산으로 도망친 조선 청년 장채훈과 만나게 되고,
그를 치료해 준 인연으로 앞으로의 스토리가 또 전개될 듯 싶은데
(아직은 진행중인 소설이라 감히 예측을 해본다)
일단은 매우 재밌다.
그리고 아름답다. 저 포스터만큼 아름답다.
글만 읽어도 머릿속에 영상이 다 그려질 정도로 생생하고 실감난다.
뮤지컬로 만들어도 영화로 만들어도 드라마로 만들어도
모두 대박을 칠 정도로 전개가 빠르고 드라마틱하다.
거의 휘몰아치는 수준이다.
작가의 묘사력이나 문장구사력도 매우 칭찬하고 싶은데
14세기 불가리아가 배경으로 나왔던 극 초반에는 외국 소설을 읽는것처럼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국적이고 신비로웠는데
1919년 경성으로 오니 그 시절의 현대 문학을 읽는 것처럼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한국적으로 변해 있었다.
예로 들자면, 나르바의 검은 눈동자를 표현하는 문장에서
14세기 불가리아때는 ‘흑진주처럼 깊고 진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였던 것이
20세기 경성으로 오니 ‘먹처럼 까맣고 북극성처럼 또렷한’으로 표현되었다.
흑진주가 먹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작품의 분위기가
서양적에서 동양적으로 확 달라지면서 작품의 몰입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 외에도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써서 집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은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요즘처럼 문화 컨텐츠와 국제 정세가 예민하고 민감하게 맞물리는 시대에
상하이에서 온 나르바가 조선 땅에서 처음 한복을 접하게 된다는 부분이나
그 시절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던 일본의 만행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소위 국뽕을 일으킬만큼 사실적이고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주인공 캐릭터가 뱀파이어라는 판타지가 있지만
소설의 주요 배경과 스토리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
(1396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불가리아, 청나라의 몰락, 일제강점기의 경성 등)을 다루고 있기에
판타지 요소가 극의 몰입도에 지장을 줄만큼 과하거나 역사 왜곡을 일으킬만큼 지나치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르바가 불가리아인이기에
이 소설은 어쩌면 외국인의 시선에서 보는 일제강점기를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려져 더욱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일제강점기.
앞으로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 지 여전히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