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일은 20200202로 2와 0으로만 이루어진 신기한 대칭의 날이었다. 올해에도 12월 2일에 대칭을 이루는 날짜(20211202)가 예정되어 있지만, 2020년의 2월 2일만큼 멋있는 날짜는 사는 동안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그날은 2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온오프라인에서 상당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는 100, 200 등 딱 떨어지는 수나 4,7,8 등 특정 숫자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을 미신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무시하거나 맹신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지만 믿음이나 의미를 넘어선 형태적이고 객관적인 숫자의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휴대폰 배경화면을 통해 2시 22분을 우연히 본다면 아마 캡처의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 것이다. 그날이 2월 22일이고, 그 해가 2022년이라면 더욱.
이 단편은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에 벌어진 일이다.
되돌리는 것
이 소설은 꿈을 매개로 한 타임루프(time loop)를 다룬다. 주인공 민현은 꿈에 2월 22일의 특정 사건이 반복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미래를 암시하는 꿈이 아닐까 하는 가정에 들어간다. 살면서 누군가는 드물게 예지, 또는 그것에 대한 꿈을 꾸는 경험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다. 민현은 아마 자신의 꿈이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친구인 성지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반드시 꿈에서 나온 것처럼 행동하고자 애쓴다. 성지가 아무리 못마땅하다는 듯 군다고 해도 자신은 ‘예지’를 꾸었다는 듯 필사적으로 카페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타임리프, 또는 루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을 ‘되돌리고자’ 하느냐에 달렸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상상일지라도 주인공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과학과 이성을 거스른다. 이 단편의 배경처럼 아주 미래가 아닌 2년 후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한들,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더 많을 뿐이다. 그러니 현재가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이루는 것은 오직 주인공의 바람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타임루프를 통해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는가.
시간여행이라는 테마에서 유독 많이 등장하는 패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것 역시 시간여행과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진부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과거의 틀을 답습하기 이전에 작가가 새로움을 찾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작가는 신선함을 위한 장치를 소설에 대체로 잘 녹여냈는데 가장 인상적으로 꼽을 만한 것은 역시 ‘화자’의 변화이다. 이 소설의 화자(또는 서술자)는 중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물론 시점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의 미스터리”는 두 명의 화자로부터 기인한다.
작가는 소설의 앞부분 화자를 민현으로 설정하며 민현이 꾼 꿈에 다른 것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한다. 그에 대한 여지도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당연히 ‘일반적인 꿈’이라면 그것을 꾸는 동안이 누군가의 조종이나 간섭도 받지 않은 주인공만의 온전한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작가가 민현의 입과 생각으로 전하는 ‘예지’에 대한 서술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 또한, 대체로 의심하지 않는다. 2가 아주 많이 들어간 어느 날, 그리고 그날의 반복은 2라는 숫자가 들어감으로써 색다른 느낌을 주지만 흥미를 끌거나 강한 인상을 주기에는 아쉽다.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초반의 흐름을 매끄럽게 한다. 독자를 위해 소설의 중반에 최후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 2시 25분, 경기도 세진시에서 트럭이 카페를 향해 돌진, 카페에 있던 2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문장은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되살리는 것
민현의 되돌아가는 시간에 주목하던 독자들은 위의 인용을 중심으로 ‘되살리는 것’에 주목한다. 시간여행 소설을 읽다 보면 가장 집중해서 보는 것은 역시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 속 시간을 되돌리느냐’인데 이 소설은 ‘초능력’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실 과학적으로 시간여행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적기 마련이라 이 작품처럼 대부분은 면밀한 증거를 댄다기보다는 매력적인 소재와 재미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에 등장하는 ‘초능력관리본부’는 민현, 아니 성지의 시간이 되감기는 데에 적당한 이유를 부여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후반의 타임 루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초능력’이 아니다. ‘꿈을 통한 암시’이다.
성지는 그냥 시간을 돌려서 민현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결하는 초능력이라면 자칫 밋밋하거나 지나치게 먼치킨인 주인공을 내세우며 독자들에게 무력감을 줄 수 있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하나의 세계에 혼란을 불러 일으킬 우려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좋은 장치는 역시 ‘제약’이다. 초능력이라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율과 법도 안에서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정하기 위해 이 소설 안에는 ‘초능력관리본부’가 존재하며, 작가는 지금의 법과 질서가 사회를 유지하듯, 초능력에도 일종의 금지조항을 차례로 부여하며 작품 설정과 인물의 폭주를 막는다.
누구나 아무나를 되살릴 수 있는 사회가 아닌, 적당한 선 안에서, 일정하게 초능력을 써야 하고 금단의 선을 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는, 어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회가 아닌가. ‘초’능력의 사전적 정의는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임에도, 그것을 조절하기 위해 현대의 질서와 같은 사회적 약속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심지어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초능력’이 혼돈을 일으키지 않고 현실과 가상을 팽팽히 오가는 것이 독자들의 마음을 보다 편하게 만든다. 바로 질서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세계에서, 지금과 같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작품의 초반과 후반이 같지만, 독자들은 성지의 입장에서 이전과 다른 것들을 감각한다. 민현의 시점에서 하나하나 이루어지던 일들이 신기했고 다음의 예지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면, 성지의 시선으로 모든 일이 더 이상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반복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이렇듯 민현에서 성지로 시점이 바뀌는 것은 단순한 화자의 이동이 아닌, 독자의 마음에 큰 파장을 불러오는 매개로 작용한다.
반복과 중복의 경계에서
반복과 중복의 경계는 ‘민현의 꿈’이다. 암시가 되어야 했던 그 꿈. 결국 예지가 맞았지만 이루어지면 안 되었던 그것은 잔인하게도 차례차례 이어진다. 성지의 눈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되짚는 카페의 일은 상당히 잔인하다.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했다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은 그렇게, 다를 것 하나 없이 그대로 반복된다. 그렇게 2가 가득한 어느 날의 죽음은 두 번 이루어진다.
민현은 “우리 인생에서 2가 가장 많은 첫 번째 순간”이라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이미 보낸, 성지는 민현의 놀라운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초조해한다. 결국은 친구를 보내야만 했던 성지의 마음은 결말의 담배 피우는 장면으로서 확인된다.
“있잖아, 너는 오늘이 2번 반복되어서 2가 더 많아지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이렇게 천진하게 묻던 친구를 한 번만 살려주었으면 안 되었느냐고 묻는 성지와 독자의 질문에 되돌아오는 답은 없다. 때로는 시간을 되돌려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듯,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실행하면 그 결과가 이렇다는 듯 세계를 창조한 누군가는 답이 없다. 잔인하게도 그렇기에 이 소설은 한층 더 완결성을 갖는다. 2로 모든 것을 시작한 작품이니 2로 끝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 번, 네 번의 기회를 준다면 이 세계의 질서가 깨지는 것이니 때로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되돌리고자 하는 것에서 되살리는 것으로 흐른 소설의 결말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였다. 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들이 가득한 황무지, 어느 가느다란 국경에서 성지는 담배를 꺼내 피운다. 왜 그랬냐고 항의하지도, 무력하게 보이는 초능력에 격렬히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냥 두 번 반복된 어떤 일에 대한 회의나 깊은 슬픔은 폭발적이지 않아도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우리도 돌이킬 수 없었던 한 사건을 마음에 묻으며 그 옆에서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다.
맺으며
이 작품은 이상한 소설이다. 이상하게 매력적이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지만 홀가분하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다, 그러니까 이리 와, 함께 무언가를 추억하자.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니.
시간여행이 가능한 어느 미래에 내가 초능력을 가진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상주의자에게 작가가 쓰는 담담한 편지다. 제약과 규율 속에서 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지독히 슬프지만 그를 최선으로 떠나보내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2가 가장 많을 생의 어느 날을 보내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적어도 그날만은 후회 없이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만약 어떤 슬픈 일이 발생하더라도,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고.
이미 그 시간을 담담히 보낸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