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드라마, 영화, 무대 등의 매체에서 최근 시간여행은 각광받는 소재이며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발생하거나 때로 상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찾아오기도 한다. 시간의 역전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고 입증이 다양한 모양으로 이루어진들, 뻗어버린 사람의 상상력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가장 불가능한 방식의 시간여행을 향해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였다. 터무니없는 재미부터 치밀한 과학적 증명이 뒷받침되기도 하는,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시간여행에서 우리는 욕망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 또는 되돌리고 싶은 것을 마주한다. 얻거나 해내거나 바로잡는 방식으로 거대하고 사소한 여행이 지금도 누군가의 머리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청귤 작가의 소설 〈하얀색 음모〉 속 시간의 움직임은 사소하고 의문스럽다. 수백 수천 페이지에 걸쳐 불가능하다고 증명된 시간여행이 고작 빛바랜 음모를 뽑는 일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지극히 신선하다. 하지만 대체 왜, 어쩌다 하얀색 음모는 시간을 주관하는 거창한 자리에 앉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건 인간의 바래버린 털에 시간의 흔적이 선명히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가장 선한 음모(陰謀)
제목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분명히 체모의 한 종류인 음모(陰毛)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옅고 선한 음모(陰謀)가 전반에 깔려 있다. ‘음침한 꾀’라는 본 의미와는 잘 맞지 않지만, 아무튼 음모는 마치 자신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달라는 양 독자를 설득한다. 마치 자신이 소설 안의 모든 일을 꾸며냈다는 것처럼. 자신으로 인해 주인공이 갇혀 버린 것처럼.
어쩔 수 없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쩔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멈춰버린 어느 시간대 안에서, 주인공이 정확히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보내는 장르를 우리는 흔히 ‘타임 루프(time loop)’로 분류한다. 타임 루프는 여타의 시간여행 장르보다 조금 더 까다롭고 독특한 매력이 있으며 ‘갇힘’이 주된 요소로 등장한다. 일정 구간의 시간이 반복되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지루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타임 루프는 ‘현대인의 무료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거나 ‘일상을 낯설게 보기’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는 한편, 그 안에서 치열하게 ‘다름’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을 내세워 매력을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종종 시간이 반복되는 시발점을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는 등의 차이를 줄 수도 있다.
타임 루프는 흔히 ‘영웅’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로 보인다. 대형 영화사에서 만든 시간여행 영화나 의도적으로 거대한 배경을 내세운 작품에서 타임 루프가 주된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시간을 잠시 가두기 위한 장치로 일시적인 삽입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지구의 종말’을 일으킬 정도의 큰 사건을 기점으로 반복되는 구간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보통 타임 루프 안에서는 일상적인 상황이 배경이 된다. 반복되는 위기 상황에서, 친구를 구하거나, 실패한 사랑을 이루어내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려 한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글쎄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과는 관련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타임 루프에서는 영웅이 나오기 어려운 것이지, 영웅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영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서로를 영웅이라 부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살고 있다. 오늘을 이겨낸 나에게 ‘당신은 영웅’이라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찬사를 보낸다. 이런 박수갈채를 받으며, 정말 내가 영웅인가, 영웅이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웅은 무엇일까. 영웅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대체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라면 쫄쫄이 옷과 초능력 말고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영웅의 사전적 의미는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웅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보통’이 정의되어야 한다. 그럼 ‘보통’은 무엇일까. ‘쩜쩜쩜(…)’ 보통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까지가 보통입니다. 저기부터는 특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경계와 표지판 역시 없다. 보통을 정의 내릴 수 없다니.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 차례 혼란을 겪는 척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보통’이 존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특수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통이 사라진 시대다. 무엇을 판단하던 기준과 제한이 풀리고 나와 네가, 너와 또 다른 사람이 다르며 실상 어떤 것도 규정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 나도 특수하고 너도 특수하다. 너와 또 다른 사람 역시 특수하다. 영웅은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며! 우리는 만세를 불러야 한다. 보통은 없고 특수만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보통의 정의가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영웅이 될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음모’를 뽑는 행위 역시 특수하다. 주인공 ‘나’는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난 ‘하얀색 음모’ 역시 특수하다. 검거나 어둡다고 여겨지는 털 사이에서 홀로 흰색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구하거나, 고양이를 구하거나, 노인을 구하는 행위 역시 영웅적이다. ‘나’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의 타임리프 속 누군가는 영웅이다.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자신만의 특수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던 이 영웅은 누구인가
〈하얀색 음모〉 속 ‘나’는 음모를 뽑음으로 인해 반복되는 시간 안에 산다. “확실히 하얀색 음모를 뽑은 게 하루가 반복되는 원인”이다. 그 안에서 그는 크로플을 만들어 먹고 “엉덩이 위로 올라오는 검은 색 경량패딩”과 “하늘색 수면 바지”, “끈을 단단히 묶은 운동화”라는 다소 적응 안 되는 패션으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일을 해결하고 난 두 번째 외출에서는 “검은색 기모 바지와 검은색 티”를 입는다. 이 소설의 초반에서는 주인공의 복장 묘사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는데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옷은 누군가를 ‘구하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량 패딩이 엉덩이 위로 올라와야 하는 이유는 달리는 데에 편리함을 주기 위해서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은 것도 헐거워 넘어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노력은 ‘선호’라는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영웅이 입는 쫄쫄이가 경량 패딩과 다를 것은 없다. 고양이를 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선호를 구한 후에는 고양이 간식을 산다. 매일을 반복해서 살다 보면 자연히 주변의 ‘구해야 할 것’에 눈길이 가기 마련인 것처럼. 고양이 간식은 이를테면 초능력인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초능력.
주인공은 선호를 구하고 고양이를 구하고, 어머님을 구한다. 간혹 번외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노련하게 경험을 쌓아 그 세 가지 일을 깔끔히 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가 말끔히 진행되면 이 소설은 ‘구하는’ 행위에 의미를 둔 채 밋밋하게 끝나버렸을 것이다. 〈하얀색 음모〉는 결말에서 반복 속에 발생한 작은 균열을 통해, 얼떨결에 루프를 빠져나온 주인공을 조명한다. 그리고 그 균열은 ‘구하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다. 영웅의 삶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한 번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갇힌 시간 안에서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남자를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다. 하지만 그는 남자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고양이를 살리는 것이 결국 옳은 행동이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다정하게 데려온 고양이를 씻기고 그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평소의 반복과 다른 것이었고 그로 인해 결국 시간의 루프가 깨짐을 경험한다.
결말에서 고양이와 주인공은 일면 동일성을 보인다. 주인공에게 있던 하얀색 털이 고양이에게 옮겨갔기 때문이다. 시간의 반복을 끝내는 것보다 더욱 부드러운 방식으로 고양이와 ‘나’는 서로의 모습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같은 시간의 반복 안에 갇혀서 죽거나 살거나, 구하지 못하거나 구하거나 했던 두 존재가 서로를 확인하는 마지막은 더욱 다정하다.
맺으며
청귤 작가의 소설은 여전히 따뜻하다. 늘 그의 소설 안에는 어떤 방식의 온기가 있다. 개인의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말한다면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영웅은 ‘보통’이 아닌 일을 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모두 ‘보통’이 아닌 존재다. 일상의 영웅을 청귤 작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찾아냈고 그를 하염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정확하게 배치했다. 다만 작은 고양이를 지켜내고 그 고양이와 시간을 나누어 갖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는 소설을 쓴 작가에게도 온기가 함께하길, 이토록 따스한 음모(陰謀)라면 모두에게 한 번쯤은 깃들어 주길 바라며 감상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