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서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고, 중간중간 뭉클한 포인트가 있네요. 개발팀 직원 ‘주미’와 인공 지능 ‘케이트’의 소통이 서사의 큰 줄기고요. 이야기는 아마도 존재를 이루는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벼운 주제가 아님에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그건 작품 속 세계관이 다분히 서정적인 데다가 화자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간 대화가 친절하고 다정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야기 말미에 묵직한 반전이 있고, 화자는 가끔 그걸 암시합니다. 때문에 독자는 나름대로 그 내용을 예상해보게 되는데, 반전이란 게 으레 그렇듯 예상이 빗나가야 더 재미있죠. 그런 점에서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쯤 되면 반전의 내용을 예상하는 게 큰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도 해요. 이야기 자체가 반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반전 게임으로만 소비하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막연히 떠올리는 지능이란 개념을 인공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재료가 과연 무엇일지를 단계적으로 생각해보게 합니다. 주어진 자극에 최적화된 반응을 보이도록 짜인 스크립트는 아무리 그럴싸하다고 해도 내막을 알고 나면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죠. 지능을 갖추었다면 왠지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물론 그 자유의지조차도 허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직관의 영역에서 희망을 품게 하기에는 충분하죠. 케이트는 그런 희망을 반영하여 만든, 자율성이 아주 높은 인공 지능입니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지능의 개념에 매우 근접하게 다가가죠. 케이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한 정보를 섬세하게 습득하고 해석해서 인간 존재에 관한 의문을 하나씩 스스로 풀어갑니다. 이제 주미에게 케이트는 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품일 수 없죠. 제품이 생산된 게 아니라, 존재가 태어난 겁니다.
인공 지능 케이트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기원을 고민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성장해 가듯이요.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론 오싹해집니다. 인공 지능이 완전한 자율권을 획득했을 때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그동안 많이 봐왔으니까요. 이 작품의 결말은 어느 쪽일까 하는 불안한 이분법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갑니다. 제가 느낀 대로 표현하자면 중반 이후 이야기의 중심은 ‘인공지능으로부터의 역산’에 있어요.
‘인간이 뭔지도 모르면서 인간을 닮은 인공 지능을 만들려고 했다’는 주인공의 자조는, 불완전한 인공 지능에 의해 역으로 인간 존재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 관계에 놓이죠. 자연 지능과 인공 지능, 어느 쪽도 불변의 명제로 정의된 바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역설입니다. 케이트는 인공 지능의 마인드맵에 데이터로 존재하는 정체성의 본질을 깨닫고, 그걸 인간 주미에게 그대로 적용합니다. 다만 주미에 대해서는 사고 이전에 미리 백업해둔 데이터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재생에 긴 시간이 걸리죠. 그렇게 데이터로 구성된 마인드맵을 하나씩 만들어 대입하는 방식으로 주미를 찾기까지, 그야말로 가늠도 되지 않는 시간이 광막하게 흘러갑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의식 없이 헤매던 주미가 거짓말처럼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헤아리다 보면, 둘의 재회가 더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존재를 이루는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이 작품의 결말에 제가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지지를 보냅니다. 좋은 작품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