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원래 그냥 작가님 격려하려고 길게 써서 퇴고도 똑바로 안 하고 대충 올린 건데 (제목도 웃기라고 리뷰의 왕 운운했는데) 무슨 추천 리뷰, 이달의 리뷰, 뭐가 됐더라고요. 아니 세상에… 그래서 다시 보니까 너무 쪽팔려서 안 되겠더라고요. 리뷰의 왕이라는 것도 누가 봐도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웃긴 거지 지금 다시 보니 진짜로 제가 리뷰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으 쪽팔려… 목불인견… 그렇다고 뭐가 됐든 선정을 해 주셨는데 글을 내릴 순 없고요. 알맹이만 유지하면서 대폭 윤문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으로…
아무튼 전 〈지옥의 왕 전업주부〉 읽으면셔 웃다 죽을 뻔했는데요. 그래서 여러분도 꼭 보시라고요.
1. 진부함에 관해
육아 안 할 것 같은 사람한테 육아 시키는 게 생각보다 흔한 이야기인데요. 1985년 콜린 세로 감독 영화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처럼 온건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마피아도 있고 그렇죠. 아니 마피아가 뭐야 외계인한테도 애를 맡기는데. 왜 이렇게 아기를 이상한 놈들에게 붙여 주지 못해 안달인가. 예를 들어 광고에서 말하는 이른바 3B의 하나로서 아기라는 존재가 갖는 근원적 호소력 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요… 아무튼 저는 육아가 생각보다 흔하면서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소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게 무난해 보여도 어중간한 소설가가 잡고 쓰기에 좋은 소재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육아라는 게 사실 뻔하거든요. 안 힘들다는 게 아니고요. 당연히 애 키우기 고단하죠. 근데 그게 뭐 예를 들어 옹알이 하던 영유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부모 재산 한밑천 들고 튄다든지 온라인 무허가 단기금융을 운영해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든지 그런 게 아니거든요. 토하고 똥 싸고 저지레 치고 밥은 안 먹고 울고 뭐 그런 게 힘든 거지. 그러니까 “애 키우는 고생은 키워 봐야만 안다”라고 부모들이 말하는 이유는, 즉 육아의 고충이 예측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측된 그 사건을 몸으로 감당하는 데에 있음을 뜻한다는 건데요.
그래서 육아는 하는 사람은 힘들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제는 이래서 힘들었다, 오늘은 저래서 힘들었다, 이걸 다 들어봤자 그게 그거 같거든요. 진부해요. 그래서 제 생각에 이걸 글로 써서 재밌게 만드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걸 성공했다면 그 작가는 진짜 실력 있는 작가인 거고요. 이걸 육아의 진부함이라고 하자.
〈지옥의 왕 전업주부〉도 “뜻밖의 육아” 이야긴데요. 그러면 “뜻밖의 보모”가 누구인지가 중요하겠죠. 그게 지옥에서 온 악마예요. 근데 마계의 사악하고 강대한 존재가 인간계로 와서 돈 버느라 접객도 하고 손님에게 스트레스 받고 사장에게 야단 맞고 퇴근해선 자취방 청소하고 설거지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일본 라이트 노벨에만 여러 개 나와 있거든요. 이걸 악마의 진부함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작품은
“아기가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아기를 넣어 만드는 희극”의 진부함 위에
“악마가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악마를 넣어 만드는 희극”의 진부함이라는
이중고에 빠져 있다는 얘기죠.
근데 진부한 소재야말로 작가의 역량을 드러냅니다. 탄로날 수밖에 없죠. 이 작품은 그래서 작가의 역량이 아주 깔끔하게 증명되는 작품이에요. 너무 빨리 읽어서 땅을 쳤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울적할 때가 있는 법인데 그럴 때 꺼내 읽을 〈지옥의 왕 전업주부〉가 남아 있지 않아서 원통하다.
2. 인물에 관해
바알세불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좀 언급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더 잘 묘사할 능력이 없어요. 사실 소설 그렇게 잘 썼다고 극찬을 하면서 그 소설보다 더 뭘 잘 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바알세불의 골때림은 본문을 직접 보시는 게 나아요. 원래는
“작품명에 쓰인 지옥의 왕이란 파멸과 파괴를 관장하는 지옥 서열 2위 악마 바알세불을 말한다. 우리 마음 속 스테레오타입에 따르면 인간은 오만 가지 방법으로 망가질 수 있으며 악마는 바로 그런 인간의 약점을 공략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악마라면 감언이설로 인간을 꾀어 타락으로 인도하는 복잡미묘한 술수를 갖추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바알세불은 통 악마답지 못하다.
파괴의 악마인 그는 말 그대로 파괴만 찾는 파괴바라기다. 그는 마약이나 난교나 성인병돼지파티 등, 호쾌한 파멸의 당일배송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삿된 짓거리에 무관심해 보인다. 그는 거친 샤워의 짐승남이다. 다른 악마들이 인간을 퇴폐의 낙원으로 떨어뜨려 온갖 감미로운 쾌락으로 적시려 할 때, 바알세불은 클럽 “퇴폐의 낙원”이 입주해 있는 5층 철근콘크리트조 신축건물을 콧김으로 철거할 것이다.”
라고 썼었네요. 하이고 뭐라는 거야 참 지금 누구 앞에서 웃긴 문장 쓰겠답시고…
아무튼 저런 파괴의 악마가 있는데요. 그 악마가 아기 안고 둥개둥개 하는 게 이 작품의 핵심인데요. 그게 재밌어? 웃겨? 한번 보세요. 웃겨요… 어떻게 웃긴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설명하면 아마 팍 재미없어질 거예요.
그리고 주인공 37세 남성 이지상은 진짜 평범한 한국인 남성이거든요? 근데 그걸 너무 진짜 평범하게 선량한 사람으로 해 놔서 소름끼치게 실감이 나요. 이 작품에서 제일 웃긴 부분은 현실세계의 이지상이 내놓는 지극히 현실적인 발언들이에요. 문제의 “몇월”이라든지. 그래서 참신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묘수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정공법으로도 얼마든지 신선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결국 작품의 핵심 인물 두 명을 이미 차고 넘치도록 효과적으로 확립했다. 어떻게? 이게 작가의 기량이라는 거죠 저는. 이 작가라면 바알세불과 이지상이 둘이서 과자 먹다 사레 들리는 이야기만 써도 재밌었을 거예요.
3. 작가의 재능과 경험과 노력에 관하여
“웃기는 사람” 같은 표현을 쓰잖아요? 근데 그게 두 가지 의미가 있죠. 하나는 남을 잘 웃기는 사람, 재밌는 농담을 잘 하는 사람, 코미디언, 익살꾼, 이런 걸 말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웃음거리, 한심한 사람을 말하는 거죠. 근데 묶어서 “웃기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전 남을 잘 웃기는 재주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웃음거리”와 같은 범주로 묶인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인간이 인간을 웃긴다는 것은 극도로 고도한 지적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 두 부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진짜 웃기려고 열심히 노력을 해서 웃기는 사람이에요.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보듯이, 웃기려고 열심히 노력을 해서 웃기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작은 웃음을 줘요. 다른 하나는… 또라이들이에요. 이야기를 나눠 보면 사고방식 자체가 범인과는 달라요. 입만 열면 웃겨요. 이런 사람들 특징이, 남들 다 웃겨놓고, 사람들이 막 배아파서 복근을 누르면서 괴로워하는 동안, 자기는 안 웃어요. 아주 괘씸해.
근데 이 글 읽어 보면 이 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예요. 진짜 매회 웃겨요. 매회 한 번은 깔깔 폭소 잔치 나오는데 말이 매회지 이게 1회당 원고지 20매? 그 안에서 어떻게 매번 웃겨요. 말하자면 매 경기 홈런을 한 번씩은 기록하는 타자 같은 건데 그 정도면 리그의 왕이잖아요? 사실 제목만 봐도 일단 웃기고 회차별 제목을 보면 또 웃겨요.
그러니까 이렇게 서평을 주절주절 길게 늘어놓는 게 사실 의미가 없어요. 원래 저렇게 잘 웃기는 사람들에게는 잡다한 평가니 분석이니 필요 없어요. 듣고 깔깔 웃으며 박수 칠 청중만 있어도 되는데… 그게 없어서 묻히면 너무 아쉽죠.
본문에 이런 대목이 있는데요.
“지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구가 멸망하든, 재난이 오고 전쟁이 일어나든 심지어 자기가 죽든. 본래 아이를 오래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먼 미래보단 당장 바로 앞의 행복이 우선이다. 지상은 지금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자신의 죽음보다 소중했다.”
저는 이게 진짜 좋았거든요. 문장이 진실하잖아요. 꾸민 티가 안 나잖아요. 꾸며서 문장 예쁘게 쓰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저게 진실 그대로인 거죠. 진실한 문장은 수십 수백 바이트의 정보만으로도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꽂힐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웃긴다는 것은 고도의 지적 활동이라는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바로 이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건 포착하는 자의 진실이거든요. 그냥 자기 삶을 살다가, 느낀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걸 글로 썼고, 그 내용이 독창성과 진실성을 갖는다면 그것도 고도한 지적 행위의 산물이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그걸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고요.
그리고 본문의 문장은 대부분 이런 식이라서 진실성이 느껴져요. 그래서 무시무시한 지옥의 왕이 서울 소재 아파트에 강림하여 앞치마를 두르고 18개월령 아기에게 밥 90그램에 반찬 60그램을 먹이는 황당한 풍경에도 호소력이 생기는 거고요. 무엇보다 이러면 재밌죠 이야기가. 몰입되니까.
3. 문장에 관하여
술술 읽히는 문장이라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제 생각에는 진짜 별것이거든요. 말이 쉽지 이런 문장 생각보다 잘 없어요. 어떤 작가들은 아무리 용을 써도 이렇게 못 써요. 소설 비평의 기본 전제가 있잖아요. 작가라는 게, 일기를 쓰거나 수필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쓴다는 게, 그리고 그걸 세상에 공개한다는 게, 필연적으로 소통 욕구가 있는 거다. 당연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싶을 거다. 근데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인 거예요.
저는 〈지옥의 왕 전업주부〉의 문장은 한국어 오락 소설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면 좀 과장 같은데요. 미문으로 정평이 있는 김훈이나 독특한 문체로 유명한 박민규 같은 문장을 말하는 건 아니고요. 이 작품은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종종 틀리고요. 하지만 리듬이 좋고 술술 읽히거든요. 이건 진짜 어마어마한 장점이고 강점이고 이점이고 미덕이거든요. 잘 없어요.
주인공 둘이 각각 30대 후반과 엄청난(수천수만년? 수억년?) 노땅인데, 이 소설은 그래도 남녀노소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것도 문장 덕분이고요. 그리고 문장이 진솔하니까 농담이 너무 웃겨요. 예를 들어 “몇월”이나 “180도” 같은 단어가 웃기는데… 단어만 보면 하나도 웃길 게 없는 일상 어휘잖아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웃기거든요. 근데 작가가 가지고 있는 현실세계의 삶에 잔뼈가 굵은 그 어떤 내공? 짬밥? 참 이런 단어들 좀 뭣하다고 생각하는데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아무튼 그거랑 만나서 영국식 농담 같이 돼요. 문장에 그런 현실성이 배어 있고 그게 내용에도 부합이 되고.
저는 소설가에게 어문 규정 지적을 되도록 하지 말자 생각하는 편인데요. 이미 극도로 높은 수준으로 지키고 있는 경우가 아니면 안 하려고 해요. 어문 규정 잘 지켜 글 쓰면 좋죠. 하지만 충분히 잘 써 놓고도 “아 이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글이 아니다” 이러면서 부끄러워 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거든요. 부끄러워 하는 데서 그치면 좋은데 그것 때문에 문장을 쓰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머리에서 밖으로 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이건 부끄럽다”라고 생각하고 폐기처분 하는 거죠. 답답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그런 자기검열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말자 생각하는 편인데. 〈지옥의 왕 전업주부〉는 문장이 흐르는 물 같고 아주 좋아요. 현학이나 잘난 체가 없고, 장황하지 않고, 중언부언하지 않고, 빠르고 간단하고 명료하고. 전 이런 소설이 더 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계속 이렇게 써 줬으면 좋겠어요.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거리낌없이 써라. 사소한 것들은 나중에 손 봐도 된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어차피 출판물도 아니고 웹 연재다. 수정하면 그만이다. 지금은 좌고우면 하지 말고 마구잡이로 쓸 때다. 뭐 이렇게 말해 주고 싶은데요.
4. 무엇을 개선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원래는 딱히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냥 이대로 쭉 쓰기만 하면 대성할 작품이다 그렇게 봤는데요. 근데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아쉽고. 일단 사람들이 알아봐야 그 이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는 건데. 그래서 가만히 돌이켜 보니까 만약 내가 이 작품을 불운하게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차했다면 언제 하차했을까? 웹소설 요즘 엄청 많이 나와서 무한 경쟁인데요. 보통 1화에서 하차가 제일 많죠. 그러면 그런 독자들은 명작을 알아보지 못해 그들에게도 불행이고 작가에게도 불행이고. 근데 이 작품은 1화가 제일 덜 웃겨요. 다른 모든 회차는 다 마음 가는 대로 일필휘지로 쓰더라도 1화는 좀 빡시게 공을 들여서 수정해 볼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