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없음. 본작의 ‘06. Nous Avons Rêvé D’une Printemps (5)’ 즉, 1부의 엔딩까지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제목엔 프랑스 뮤지컬 《1789 les amants de la bastille》 中 “Ca ira mon amour”라는 곡명을 직역해 인용했습니다.)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다, 라는 말이 있다. 대학 총장의 딸 아나이스와 둘째 황자 레오나르는 그렇게 다른 시야가 겹쳐진 풍경에서 만났다. 다른 풍경 속에서 태어났으나 둘 다 상냥하고 선한 사람이다.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청렴하고 성실한 둘이 처음부터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것은 아니다. 상냥한 사람들이기에 주변을 돌보다가 자연스레 혁명을, 제위를 꿈꾸게 되었을 뿐이다. 아나이스는 오라비와 아버지처럼 권력에 개죽음당하는 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어서, 레오나르는 아나이스가 권력을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울어도 되는 세상을 꿈꾸어서. 누군가는 현실감각 없이 어리석다고 말할, 증오 아닌 상냥함으로 새 세상을 꿈꾼 이들.
사람이 만든 세상은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가혹하기 그지없어서, 어린아이들은 보호자나 미소를, 더러는 목숨을, 셋 모두를 잃기도 한다. 아나이스와 레오나르는, 상냥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그러나 피에 피로 맞설 만큼 아직은 모질지 못한 이들은 그저 자기 혐오와 분노를 삼키며 주변을 돌보려 애쓸 뿐이다. 물론 분노의 대상이 될 악은 존재한다. 개인적이고 소소한 시대의 욕망들이 모여 악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남을 짓밟지 않으려 노력하는 선의 영향력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어, 악을 압도하지 못한 채 욕망으로 범람하는 시대 속에 표류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선이 패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1부만 보았지만 단정할 수 있다. 아나이스와 레오나르는 패배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혁명을 그리지도 않으며, 혁명의 완성을 종착점으로 삼지도 않는다. 이야기의 초점은 죽어간 아이들,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이다. 거대한 시대의 파도가 아닌, 광대한 바다를 표류하는 무수한 종이꽃들이다. 그러나 신파적이지도 않고, 제정과 공화정 모두 나빠! 같은 아둔한 말이나 지껄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죽은 목숨과 산목숨을 논한다. 또박또박, 담담하게 말이다. 혁명은 필요한 것이었으나 죽어간 아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선의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주연들은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한다.
그러나 아주 가끔, 따스한 볕 아래의 소풍 같은 나날들이 있었다. 죽은 오라버니와 같은 이름의 남자, 죽은 조카 또래의 아이가 자잘한 과오를 묻지 않으며 함께해주는 하루가 있었다. 큰 사건 사이 잠시 쉬어가는 코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하루야말로, 혁명도 황제도 덧없는 수단일까 좌절하던 이들에게 닿은 – 목적 그 자체인 – 별빛이었다.
평생을 걸어도 닿지 않을 하늘 위의 별이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벽 별빛이 말해주지 않는가, 아무리 어렴풋한 빛이어도 그 또한 빛이라고. 빛과 지상의 존재는 언젠간 마주 닿는다. 마르셀 블랑의 말마따나,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요.”
앞선 시련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뒤에 올 시련을 이겨낼 것이란 확증은 되어주지 못한다. 그러나 아나이스와 레오나르는 다다를 것이다. 지켜야 할 아이가 있으니까.
Per aspera ad astra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