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불가능에 대한 상상을 품고 산다. 당장 오늘 퇴사할 수 없음에도 사직서를 겉옷 어딘가에 챙겨두고 산다거나 과제가 너무 많다면 자퇴를 해버릴까 싶은 생각을 하는 등이 그런 것이다. (굳이 얼마 전에 시험이 끝나서 이런 예시를 드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일상적인 불가능을 예로 들었지만, 심리적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는 일은 이런 사소한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여행을 바랄 수도 있고, 여기저기 산재하는 평행우주를 떠올릴 수 있다. 평행우주와 지금 당장 자퇴하고 싶은 욕망이 무슨 연관성 위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일상성과 비범함이라는 차이를 안고 있더라도 둘은 분명 ‘불가능’을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카페에서 연주회가 있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갑자기 카페 측으로부터 플레이리스트에 지정곡과 다른, 그것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를 추가하겠다고 연주회 10분 전에 통보받게 된다면. 이 피아니스트는 분명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생각을 하는 동시에 어느 평행우주에서는 이 노래를 아는 내가 존재하기를 빌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소원은 어느 것이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싶어 한다. 위의 사례와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시간 여행자를 만난 1900년대의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는 물론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연주해야 하는 상황을 일단 피했지만, 어쩌면 21세기의 우리는 그가 요청받은 곡을 간절히 피아노 연주로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제안받은 연주곡이 BTS의 ‘Dynamite’라면 말이다.
Cos ah ah I’m in the time machine tonight
시간여행을 상상하는 일을 좋아해서인지 헤이나 작가의 〈카페라떼와 죽음을〉은 소재와 전개의 면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다. 피아니스트와 시간 여행자. 그리고 평행우주라니. 완벽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평행우주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있다. 나는 그중 일본 영화 〈오렌지〉에 등장하는 평행우주론이 이 작품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1 이 영화는 현재의 주인공이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오렌지〉에서 타임 패러독스를 평행우주론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는 익히 알려진 방법이기도 하지만 평행우주를 아주 쉽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주인공이 현재에서 미래의 자신이 낸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더라도 ‘현재 주인공의 세상’에만 변화가 이루어지는 식이다. 미래의 자신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나의 평행우주가 생성되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의 분기점은 ‘미션의 해결’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를 조금 긴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한 이유는 〈카페라떼와 죽음을〉의 발전 가능성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라떼와 죽음을〉 역시 한 사람의 시간여행으로 인해 여러 개의 다중우주가 발생하는 형식을 띤 소설이다. 여기에서 다중우주의 분기점이 되는 것은 ‘시간여행’ 자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종의 모호함이 보인다. 시간여행에 대해 다루는 소설에서 면밀하게 다루어야 할 것 중 하나는 ‘인과관계’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넘나든다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장치이지만, 그 시간대나 상황, 사건의 전후를 명확히 설정하지 않으면 독자에게 혼란을 줄 여지가 있다.
헤이나 작가는 특유의 단정한 문체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을 표현했다. 이는 문장이 불명확하다면 자칫 복잡하게 느껴졌을지 모르는 플롯의 구성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다.
스토리텔링 이론에서 시간과 복잡성을 다룰 때 흔히 논의되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캐릭터/표현 방법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스토리와 캐릭터, 표현 방법 중 하나는 단순화해야 독자가 읽는 데에 보편적으로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스토리와 캐릭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면 표현 방법은 단순화해야 하며, 캐릭터와 표현 방법을 복잡화했다면 스토리는 단순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카페라떼와 죽음을〉은 어떨까?
이 작품은 플롯에서 이야기를 다루며 ‘시간여행’을 사용했다. (스토리) 또한 과거로 돌아가며 자신의 신분과 국적, 기억을 지운 주인공 닐과 시간 여행자 겸 탐정이 등장한다(심지어 에스더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는 지구인이 아님에도 사람의 외형을 가진다). (인물) 마지막으로 표현 방법에서는 닐과 에스더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진행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면에서 분석해 보았을 때, 〈카페라떼와 죽음을〉은 작가가 상당히 많은 장치를 도입하여 쓰려고 했던 소설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작품에 많은 장치를 도입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 안에 충분한 공백과 여유가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몇 가지는 덜어내어도 좋다. 하나씩 그 기능을 살펴보았을 때, 굳이 역할이 크지 않은 것은 생략하거나 더 편안한 소재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 작품에서는 에스더라는 인물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에스더는 시간 여행자이며, 탐정이자, 지구인이 아니고, 고양이이다. 하지만 소설 안에서 그의 속성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시간 여행자’라는 점뿐이다. 어떤 인물이 외계의 존재이며, 고양이라는 속성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줄 수는 있지만, 소설 안에서 그러한 설정이 제대로 기능하는 장면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에스더는 시간 여행자이자 탐정2이라고만 설정해보자. 훨씬 더 다른 요소에 집중하기 쉬워진다. 사실 에스더를 시간여행이 가능한 BTS의 팬(아미)이라고 표현하는 방향도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소설 안에서 작가가 모든 요소를 제 기능에 맞추어 치밀하게 배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역할을 하지 않는 장치가 많은 것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설정의 중간 지점을 잘 찾아내는 것이 소재를 고르는 데에 있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 안에서 좋은 요소로 작용할 만한 부분 역시 눈에 띈다. 이번에는 에스더가 아닌 닐에 주목해 보자. 닐은 한국인인 동시에 외국인이다. 시간여행을 하며 바뀐 것은 그의 이름만이 아니다. 이지훈과 닐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이것이 기존의 타임리프 소설과 이 작품의 차별점이다. 보통의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에서 주인공은 고유성을 가진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간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과 직업, 심지어 국적을 바꾸고 기억마저 지워버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분명히 헤이나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인물이 자신의 고유성을 버리고 또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점은 한편으로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에 주목한다면 지훈이 자신의 별것 없는 상황을 버리고 적어도 좋아하는 음악만은 제대로 할 수 있는 닐을 선택한 것이 훨씬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이는 두 세계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과연 커피여야만 할까.
위에 소개한 영화 〈오렌지〉에서는 ‘편지’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다. 이처럼 시간여행의 스토리텔링에서 두 세계의 연결점은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묘미가 된다. 커피는 닐과 에스더, 지훈을 연결하기에 적합한 수단인지에는 의문이 남는다. 닐이 피아니스트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에 악보나 음표, 피아노의 특정 건반을 시간여행의 수단으로 삼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물론 왜 커피를 매개로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헤이나 작가는 커피보다 더 매력적인 시간여행의 수단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You’re diamond you know it’s glow up
작품을 읽으며 들었던 이런저런 생각을 엮어내는 재주는 여전히 나에게 부족하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이것저것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보았다. 분명한 것은 현재성을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는 BTS의 ‘Dynamite’와 1900년대의 피아니스트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간여행과 그에 대한 비밀을 잘 조직했다는 점에서 소설 안의 긍정적인 면을 충분히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실 글을 쓰는 기술은 차츰 익혀가면 되는 것이지만, 상상과 그것을 이어내는 과정은 작가 특유의 방법이 반영되기 때문에 매끈하게 구성에 성공한 소설을 본다면 그것만큼 독자로서 행운처럼 느껴지는 경험도 없다. 헤이나 작가는 그런 면에서 원석과 같은 작가다.
작가의 단편을 모두 읽지 못해서 글을 쓰는 경향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스스로에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소설에서 보이는 빽빽함은 설정에 빈틈이 있는 것보다는 나으므로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물과 상황의 설정, 시간여행과 커피를 이어낸 구성력과 그것을 이어내는 전체적인 문체에 있어 강점을 보인다. 이야기에서 덜어낼 것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부족한 점이 없다는 방향으로 해석해도 좋다. 듣고 있자면 신나는 BTS의 노래처럼 한 번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헤이나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가 된다.
그러니 Dynamite의 한 구절을 빌린다면, 빛날 작품에 어울리는 적절한 응원의 메시지 하나는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