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찍힌 아이가 정말로 폐기되었을지 걱정되니까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완전 (작가: 유령선, 작품정보)
리뷰어: , 20년 12월, 조회 112

필자가 어떻게 본작의 리뷰를 써야 할지 몰랐고, 모르기 때문에 횡설수설할 예정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낙인을 찍고 자신보다 못하다며 짓밟은 순간순간이 사람의 역사였다면, SF의 역사 또한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문학의 역사로 확대해도 그럴지 모른다. 대체로 ‘나’와 ‘너’의 조우이지 않은가. SF에선 주로 그 ‘나’가 인간, ‘너’는 안드로이드나 외계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니까. 최초의 SF 소설 중 하나로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또한 그랬으니, 이렇게 일반화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웬만해선 소재가 새로울 수 없다. 흔한 아이디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자체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미 수천 번쯤 우려 먹힌 아이디어를 끌고 오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라고 본다. 하나는 그 분야에 관한 공부를 안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에 담고 싶은 자기만의 감정이 있기 때문일 터다.

필자는 본작이 후자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야기는 ‘나’가 ‘너’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한다. 청소년 소설이다. 남유하 작가의 <푸른 머리카락>이 그렇듯, 인간인 동급생이 비인간 급우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인데 이것도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 필자는 왜 본작에 끌렸던 걸까? 아, 정말로 몰라서 던진 질문이다. 이번 리뷰는 필자가 왜 본작을 재밌게 읽었을까에 관해 짧게 고민하는 지면이니까. 혼자 그렇게 정했다!

얼마 전 이경희 작가의 트위터에서 이런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저는 그래서 아이디어에 집착하기보단 이야기와 감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해요. 감정은 나만의 것이니까.”

본작의 작가는 감정에 주력했다. 새로울 것 없는 아이디어나 전개를 뽐내는 대신, 그 사이사이 접착제처럼 발린 감정을 내밀어 보인다. 주인공인 ‘나’가 품은 감정은 상실로 인한 슬픔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친구인데 왜 나와 달리 너는 돌아오지 못하는가? 너는 나보다도 선명히 낙인찍힌 아이였으니까. 너는 불완전했기에 완전했으므로 돌아오지 못했다. 안드로이드에게 요구되는 ‘사람다움’이란 것이 있다면 너는 누구보다도 사람다웠고, 그래서 폐기당했다.

“아, 피노키오도 블레이드 러너도 틀렸구나, 생각했어.”

이야기 속엔 분노와 슬픔만이 있지 않다. 다리 아래에서 나누던 이야기, 어리숙하게 짓던 미소, 서로에게 뚫린 구멍을 보며 하던 생각들. 그런 소소한 것들이 질감을 만든다. 아니, 그 소소한 것들이 본작의 주된 것이다. 다른 것들은 딱히…그렇게 중요한 것들일까? ‘너’를 만든 창조주는 ‘제페토 할아버지’ 정도로 가볍게 은유하여 지나가는걸.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 중 이런 대목이 있다. 뺑소니 사고로 연인을 잃은 남자에게 그의 친구인 모르페우스가 말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말해달라고. 처음엔 복수를 꿈꾸던 남자가 이내 생각을 고쳐 대답한다.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고 달아난 범인의 꿈에 남자의 연인이 얼마나 찬란한 이였는지를 보여주라고. 그녀가 웃을 때 왜 내가 행복했는지를 범인이 알게 해달라고.

본작의 울림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너’가 어떤 이였는지 알게 된 독자들은 마지막에 ‘나’와 ‘너’가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하게 된다. 폐기 아닌 죽음에는 추모를, 실낱같은 희망엔 기쁨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나와 너를,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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