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해당 작품뿐 아니라 ‘셜록 홈즈 시리즈’의 ‘주홍색 연구’, BBC 드라마 ‘셜록’의 시즌1 – 1회에 대한 다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에 등장했던 탐정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누구일까. 이러한 질문을 듣는다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취향과 독서 경험에 따라 다양한 탐정의 이름을 답으로 내놓을 것이다. 수많은 추리 소설에는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단연 우리가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탐정의 무리에 셜록 홈즈가 빠질 리 없다. 그가 나오는 소설인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단한 붐을 일으켜 셜록의 마니아를 일컫는 ‘셜로키언’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즈 시리즈’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심지어 소설을 읽건 읽지 않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름이다. 창작 이후 백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셜록 홈즈의 활약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만큼 다양한 각색이 이루어진 추리 소설도 드물 것이며 심지어 현대에도 ‘셜록’을 떠올리게 하는 탐정 소설과 만화, 미디어의 창작은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 차례 재구성이 이루어진 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는 것을 두 번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니 말이다. 이토록 유명하고 대단한 이 시리즈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소설은 ‘주홍색 연구’이다.
주홍색 연구는 그 독특한 구성과 진행, 셜록의 강렬한 첫 등장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술자인 왓슨 박사의 룸메이트인 탐정 셜록은 관찰력이 대단히 뛰어나고 생각의 치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순한 어림짐작이 아닌 면밀한 탐색에서 진실을 뽑아내는 그는 가히 이전에 없던 탐정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런 셜록이 소설에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맡은 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주홍색 연구’는 독살을 주제로 한다.
나는 지언 작가의 단편 〈녹색빛 연구〉가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이 유명한 탐정 소설을 오마주했다는 것을 소설의 중반이 되도록 알지 못했다. 전혀 셜록 홈즈 시리즈의 느낌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했으나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작가 특유의 문장과 구성력으로 풀어냈기 때문에 전혀 그와 관련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녹색빛 연구〉에서 ‘주홍색 연구’의 맥을 읽어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을 가득 채우는 초록빛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녹색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색이다. 에메랄드라면 더욱!) ‘주홍색’과 ‘녹색빛’. 둘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주홍색은 강렬하고 정열적이며 미스터리하다. 셜록 홈즈 역시 자신의 사건을 ‘주홍색’이라고 부르며 “주홍색 살인의 혈맥”1이 흐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에 반해 녹색빛, 특별히 에메랄드 빛은 차분하며 정적이고 마음에 평안을 준다. 따뜻한 녹차의 색이라고 초반에 소개된 녹색은 특별히 어떤 평온함마저 소설에 깃들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색 역시 ‘살인’의 배경으로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주인공 그린 베버는 어릴 적부터 화학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블라이크 베버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는 그린의 꿈은 장차 ‘화학’적인 맥락의 장치가 소설에 깊게 개입할 것이라는 확신을 독자들에게 심어준다. 그 ‘화학적’ 장치는 ‘독’으로서 작품에 소개되고 19세기 영국이라는 배경을 보아 알 수 있듯 결론적으로 에메랄드빛 페인트에 섞인 ‘비소’라는 독극물이 여러 사람의 죽음에 개입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단적인 감상을 먼저 말하자면 이 소설은 ‘주홍색 연구’를 대단히 독특한 방법으로 오마주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범인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는 ‘추리’ 소설임에 반해 〈녹색빛 연구〉는 범인이 일찍이 등장하고 죽음의 원인을 밝힌다는 점에서 ‘미스터리’에 가깝다. ‘주홍색 연구’가 범인과 범행 도구 모두를 끝까지 비밀에 감춰두었던 반면, 〈녹색빛 연구〉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숨기지 않고 신비스럽게 던진다. 또한, 범인이 사람들을 죽인 방식을 밝히는 과정 역시 트릭을 통해 셜록 홈즈의 작품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유도한다. 이 모든 것이 ‘독살’이라는 암시를 넌지시 보이는 것이다.
〈녹색빛 연구〉는 ‘주홍색 연구’의 원작 소설보다 BBC 드라마를 통해 각색된 색이 더욱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결말부에서 수 페이지에 걸쳐 독살에 대한 비밀을 언급할 뿐인 반면, 드라마에서는 꽤 긴 시간에 걸쳐 택시 운전사와 셜록이 대면하여 트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드라마와 유사하게 트릭에 대한 계산과 결정을 긴 분량에 걸쳐 다루고 있다. 원작 소설보다 드라마가 ‘트릭’의 면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녹색빛 연구〉 역시 독을 이용한 확률게임의 진행에 긴 분량을 할애한다.
‘주홍색 연구’의 원작이 대략 100년 전에 쓰인 것을 감안했을 때, 드라마로서의 각색은 현대의 독자와 시청자들이 열광할 만한 전개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녹색빛 연구〉가 드라마와 흡사한 진행을 택한 이유는 ‘현대의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탐정도 등장하지 않고 범인 역시 밝혀 놓은 이 작품에서 트릭조차 강조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지언 작가는 ‘주홍색 연구’의 각색을 읽은 그 어떤 독자보다 가장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최적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소설 전반에 대한 얼개를 보았다면 작가 개인이 가진 장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작품에서 파악한 바로는 문장이 치밀하며 속도감 있다. 지언 작가는 중편이라고 할 만한 230매의 다소 긴 소설에서 독자와 긴장감의 줄다리기를 훌륭하게 해냈다. 만약 지언 작가가 이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작품의 맛이 느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에 통일감을 주는 ‘초록’이라는 색채는 앞서 언급했듯 작품의 전반에 걸쳐 차분함과 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또한, 〈녹색빛 연구〉는 1900년대 영국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이국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이 두 가지가 소설의 매력으로 꼽힐 수 있는 이유는 덜걱이는 요철이 없이 포장 도로를 달리는 듯 진행되는 소설의 매끄러움과 인과성의 이어짐 덕분이다. 녹차로 시작해 ‘그린’이라는 이름과 에메랄드 페인트로 이어지는 작품의 부드러운 색채는 아이러니하게도 결말부에 드러나는 살인의 도구인 ‘비소’와 연결된다.
〈녹색빛 연구〉가 ‘셜록 홈즈’의 오마주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배경인 1900년대 영국 또한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한 지점을 기준으로 배경에 대한 일종의 연결성이 확보되는 셈인데 셜록 홈즈의 트릭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1900년대 영국이라는 시간과 장소가 원작과 독립적인 배경으로 소설에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그 모든 시간과 공간들이 원작과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주홍색 연구’와 같은 시기와 공간을 배경으로 재창작을 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자칫 원작에 매몰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실험이었을 테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색을 지닌 소설을 써내는 데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원작과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릭을 제외하면 거의 원작과의 관련성이 없다고 보아도 마찬가지인 이 작품은 살인의 방법과 제목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지언 작가만의 미스터리 소설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 시리즈의 트릭만을 원작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야 할지 스스로도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보든 개인의 좁은 해석이 되어버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다른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주홍색 연구’와 독립적이며 비소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보다 획기적인 트릭이 있다면 하나의 독립적인 제목을 붙여 오히려 원작과의 관련성을 끊어내는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원작이 제공한 아이디어를 어디까지 따를 것이냐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기에 제안은 이쯤 해두고 감상의 끝을 맺고자 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성장담’이며 ‘미스터리’이자 ‘역사반영소설’이다. 이 셋을 자연스레 연결하는 ‘에메랄드 그린’은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한 아이의 시간을 이끌어 나간다. 화학자가 꿈인 그 아이의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죽어가던 사람들. 고조되는 긴장감과 살인마의 정체, 통쾌한 복수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원작의 구성 바깥에서도, ‘주홍빛’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탐정이 나오지 않더라도 셜록 홈즈 시리즈가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되고 싶지 않은 걸 물은 게 아니야. 뭐가 되고 싶느냐고 물은 거지.”
작품 안에서 다른 어떤 문장들보다 내 마음을 때렸던 대사는 이것이었다.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고 초록빛도 없으며 맹숭한 일상을 담은 듯 보이는 이 문장은 지언 작가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정교한 따뜻함을 보여준다. 미스터리와 초록을 뺀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 그린 베버만이 남는다. 소설의 구성과 장치를 모두 제거했을 때에 남는 알맹이는 결국 한 소년의 성장담, 한 과학자의 인생이다.
그린 베버 박사의 마지막 연설은 이 소설이 쓰여진 이유를 말해준다. 작가는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어린아이가 어떻게 위대한 화학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가상으로나마 보여주었다. 있는 힘껏 소설 안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초록으로 시작해 미스터리로 이어져 위험의 소멸로 끝맺는다. 아버지와 도리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막고자 노력한 어린 그린 베버가 세기의 탐정 셜록 홈즈에 대응될 수 있다면 〈녹색빛 연구〉는 ‘주홍색 연구’에 뿌리를 둔 소설임을 넘어서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충분히 그 독자들에게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