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수 작가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는 입양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SF와 로맨스라는 장치를 이용해 산뜻하게 그려낸다.
어느 뻐꾸기의 개인사
내 부모는 뻐꾸기고 나는 뻐꾸기 새끼일지도 몰라.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자식을 키우기 힘들면 손쉽게 다른 곳에 보내는 부모였다. 어린 나를 돌보던 모친의 올케에겐 딸이 있었다. 다툼이 있을 때, 그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뻐꾸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돌보지 못한다는, 아이 엄마의 당연한 분노는 어린 내게 여과 없이 그대로 발화됐다. 엄마한테 이를 거야, 당당하게 말하는 동생이 부러워서 생각해봤다. 내 엄마가 여기 있으면, 저 엄마처럼 내 편을 들고 남의 자식만 혼낼까? 아닐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친부모의 집에서도 나는 뻐꾸기였다. 모친에게 나는 큰딸에게 갈 돌봄을 앗아간 존재였고, 그의 큰딸에게도 비슷한 정도로 인식된 듯하다. 열한 살, 언니의 일기장을 훔쳐본 적이 있다. 심한 축농증과 식도염으로 호흡이 곤란해 헛기침을 하면 야단을 맞던 때였다. 병원은 가보지 못했다. 일기장에는, 내가 일부러 기침을 한다는 말이 쓰여있었다. 하는 짓마다 미워죽겠어서 도저히 사랑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어린 뻐꾸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일기장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작품 속 연아름은, 입양된 가정의 친자식에 의해 ‘뻐꾸기’로 표현된다. 작중에서 아름은 꿈을 해킹하는 미래의 테러리스트들의 타겟이 되는 바람에, 백일몽을 통해 동생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뻐꾸기로 묘사하며 사라지길 바라는 질투의 마음을 확인한다. 소설에서 직접 언급되듯, 아름은 동생을 사랑한다. 그 누구보다도. 그런데 사실 아름은, 꿈을 통해 일기장을 펼쳐보지 않았어도 자신을 향한 그 미움과 시선을 아프도록 처절히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한 살 차이도 나지 않는 동생에게 엄마 역할을 하려 들고, 늘 라면을 끓여 장난스럽게 젓가락 두 짝을 들고 온다. 그토록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뒤에 지울 수 없는 의문은 외부의 개입 없이도 언젠가는 그의 앞에 진실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뻐꾸기의 슬픔과 사랑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에게서 뻐꾸기의 날갯짓을 보는 이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그래서 더더욱 애쓴다. 원만한 대인 관계, 도덕성, 성취… 그것은 잘 될 때도 있고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뻐꾸기가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날갯짓을 멈출 수 없다. 나의 언니는 입버릇처럼 내가 부럽다 말했다. 그는 분명 나보다 매력적이란 평을 들었고, 무엇이든 나보다 쉽게 이뤄냈다. 나보다 건강했으며 사랑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질투 나서 미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를 읽으며 생각해보았다. 아름이 입양되었다는 사연이 없다면, 동생이 그에게 느끼는 박탈감은 오히려 덜하지 않았을까? 내가, 미움받는 자식이 아니었다면? 아름 역시 동생이 부러울 때가 많았을 것이다. 바쁘게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질투심의 당위를 의심하지 않는 얼굴이.
소설은, 이야기의 화자인 동생과 아름이 각자의 방식으로 느꼈던 아픔이 남긴 상처를 아릅답게 봉합한다. 시간여행과 꿈과 혁명이라는 멋진 도구들이 등장하지만,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동생의 속마음을 알고 무너져내린 아름이나, 그런 언니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솔직히 통쾌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나’는 어쩌면 하나의 말을 하고 싶어 서로의 뒤에서 빙빙 맴돌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나에게 있어서의 너만큼 소중했으면 좋겠어. 꼭 그만큼만 네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그걸 확인하고 싶어. 네가 가진 것이 내게 없다 해도. 그래서 미래 사회 테러리스트들의 음모로 시작되었다는 이 사건은, 두 소녀의 방에서 이루어진 화해와 연대를 통해 소박하지만 위대하게 해결된다. 미소년 서은새와의 포옹은, 사랑이라는 작고 위대한 일을 해낸 소녀를 위한 덤이다.
우리는 미래로 간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계기가 되는 ‘카멘토’라는 음료의 –아마도-광고문구는 ‘우리는 미래로 간다!’다.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그걸 마신 아름과 나는 어쨌든 미래에 가닿았다. 지금의 상처를 넘어 서로의 아픔을 읽고 인정하며 솔직하게 사랑하는 미래에. 소설 속에서 서은새의 몸을 빌려 나타난 미래 인물은 아름이 훗날 저항군의 리더가 된다고 말한다. 미래에는 남의 꿈속에 들어가 무언가에 대해 특정한 인식을 심어놓는 테러리스트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이 이 저항군 리더를 노린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해오던 어떤 생각들의 출처가 종종 궁금해질 때가 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만이 정상이야, 부모가 없으면 사랑을 알기가 어려워, 그래서 나는 뻐꾸기야… 관성처럼 공기처럼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은 어느 순간 하나의 질문에 턱, 걸려 멈춘다. 그런데, 이런 걸 누가 알려줬지? 쉽지 않지만, 테러와도 같은 그 ‘인상’의 발톱을 뿌리치며 저항해본다. 그러기 위해 서툴게나마 어떤 사랑들을 떠올린다. 백일몽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지금, 이 순간’ 손을 맞잡은 아름과 나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오늘을 위해 미래를 불러내는 SF소설의 멋진 시간여행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