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과 박수영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이 세상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증명 (작가: 반도, 작품정보)
리뷰어: 사피엔스, 20년 10월, 조회 45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세카이계가 뭔지는 전혀 몰랐지만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전학생의 특이한 화법에 이끌려 계속 보게 됐습니다. 이름은 이세상인데 화법은 저세상이더군요. 사춘기 특유의 허무맹랑한 개똥철학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 맞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혹시 ‘이세상’이라는 전학생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그런 정체를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게 혹시 이 소설의 반전이 아닐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도대체 ‘이세상’은 세카이계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왜 그렇게 ‘박수영’에게 전파를 못 해서 안달일까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는 기행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자살)해서 세상(학교)를 멸망시키겠다는 발언에서 저는 직접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속내를 삭이며 지금껏 꿋꿋이 버텨온 게 참 장하고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고요. 혹자는 그걸 도피라고 볼지도 몰라도, 자신을 지킬 방어기제로 세카이계를 이용하고 그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걸 탓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돌파하라는 주장은 알고보면 굉장히 잔인한 말입니다. 정면돌파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회피가 더 나은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특히나 정면돌파하는 과정에서 상처뿐인 승리만 남게 된다면요. 도피 수단이 또다른 상처나 트라우마를 남기는 게 아니라면 그건 그 나름대로 괜찮은 거 아닐까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평화를 중시하느냐, 정의를 중시하느냐, 이런 식으로요.

한편, ‘이세상’이 세카이계로 끌어들이려는 친구 ‘박수영’도 알고 보니 사연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수영을 그만둔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더군요. 자신의 비리를 지적하는 제자를 수치심을 이용해 제압하는 코치, 정말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입니다. ‘박수영’은 그 코치로 인해 아마도 학교라는 시스템뿐만 아니라 이 인간 사회 자체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겠죠. 코치와의 대립은 전초전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회로 나가면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심한 비리를 수도 없이 목격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일개 학생인 박수영은 아무런 힘이 없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의 기행으로 그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예전에 유행한 한 광고가 떠올랐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 나네요. 모두가 네 라고 할 때 아니오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강 이런 말이었는데, 사실 되게 위선적인 말이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사회에서는 내리누르려고만 하니까요. 그들이 용기를 낸 결과로 감당하게 될 고통은 전혀 보살핌을 받지 못 하죠. 이세상과 박수영 모두 그러한 위선의 피해자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가르치지만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위선적이죠. 약삭빠른 아이들은 그 간극을 얼른 받아들이고 어른들을 닮아갑니다. 혹은 애초에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거나요. 집단따돌림을 벌이는 아이들이 예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어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이들은 이용당하고 희생당하고 맙니다. (세월호가 떠올라 또 한 차례 가슴이 찢어지는군요.)

이들의 아픔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엄청난 강철 멘탈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게 되거나 극단적인 일까지 저지를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이세상과 박수영이 서로를 의식하고 우정 혹은 사랑을 쌓아가면서 서로를 잃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덕분에 아픔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상대에게 의지만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이 세상에 적응해 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죠. 잘못된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그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사실, 서글프지만 모두들 그렇게 살아남으며 어른이 돼 가는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해피엔딩이라 생각돼 다행입니다. 혹시 모르죠.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두 사람이 조금은 색다른 어른이 될지도요. 훗날 세상을 바꿀 어른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왜 주인공들의 본명이 등장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가에 대한 의문도 결말 부분에서 해소가 되었습니다.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세상은 위에서 언급한 방법으로 자신과 세상을 함께 끝내 버릴 계획을 품었음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말려주고 사랑해주고 선택해주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박수영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고요. 이름짓기에서부터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이죠. 친구, 동료, 연인, 부부, 부모자식 간에 애정을 담아 애칭이나 별명을 부르는 일은 아주 흔하니까요.

두 사람이 책을 통해서 우정을 한 단계씩 쌓아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박수영이 관심없는 척 하면서 이세상이 추천해주는 책을 다 읽어보고 감명받고 세카이계에 빠져드는 모습이 참 귀여웠고요. 덕분에 저도 세카이계라는 장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언급된 책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세상과 박수영이 앞으로도 우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세상을 꿋꿋이 헤쳐나갔으면 좋겠네요.

여담인데 주인공들의 성별이 나와 있지 않은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말투에서 괜히 박수영은 남학생이고 이세상은 여학생인 것 같아서 청춘남녀 로맨스물로 생각하며 읽었는데, 작가님이 코멘트에 쓰신 대로 독자의 취향에 따라 두 사람의 성별과 관계를 상상하며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점이 참 좋았어요.

문장들도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적절한 묘사를 하고 있어 술술 잘 읽혔고요.

덕분에 좋은 작품 읽은 것에 감사드리며 이만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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