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송곳니를 가진 이들은 예로부터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했다. 긴 이빨을 가진 인간형 (또는 이물)의 원형이라 불릴 수 있는 드라큘라부터 최근까지 목격담이 떠도는 괴물 추파카브라 등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어 이빨이 긴 존재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랑받아 왔다.
음, 정정하자. 자주는 보였어도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인간은 본래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이들에 대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 그럴듯한 단어와 개념, 정의와 사례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과 경험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경계 짓기 좋아하는 종(種)들인지 익혀 왔다. 경계의 감정이 축적되면 그들은 드디어 한 집단에 이름표를 붙여 공동체에서 배제하기 시작한다. 우습게도 ‘소수자’가 되는 데에 모임의 크기는 상관이 없다.
이 소설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다. 푸른 뼈를 가지고 있기에 배제되고 죽임당한 어떤 무리에서 살아남은 한 아이. 일족 최후의 아이로 남은 주인공 라제쉬가 겪은 배척과 포용의 서사다.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아프지만, 보호해주는 이가 있기에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아픔에서 성장이 발생한다는 구조가 슬프지만, 아무래도 살아보니 그러하더라는 사례가 많기도 하다.
그러니 판타지 안에서도 상처는 존재하고, 배척과 보호, 성장과 관계가 얽히고설켜 한 사람의 생을 구성한다.
푸른 뼈를 가진 자들은
긴 이빨과 일족의 멸망에 대해 말하기 전에, 보다 개인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꺼내 보자. 소설 안에서 라제쉬는 단순히 송곳니가 길어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다. 라제쉬의 삶에 점철된 상처들은 모두 ‘푸른 뼈’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푸른 뼈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믿기 힘든, 끔찍한 하나의 성이 세워져 있다. 인간의 뼈로 만들어진 색색의 궁전이 적어도 한 마을 이상의 공동체와 그들의 생을 앗아갔다.
‘색색의 뼈’로 이루어진 궁전이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뼈가 희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유형이 하나가 아니다. 만일 왕에게 여러 색의 뼈를 수집하는 잔인한 습관이 있다면 사라진 마을 역시 한 곳이 아닐 것이다. 단지 한 사람의 욕망으로 인해 수백의, 수천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고 방금 생각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푸른 뼈를 볼 때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채, 흰 뼈의 사람들을 볼 때와 같은 눈을 가질 수 있을까.
겉으로 보이지 않는 뼈를 우연히 본 사람들도 이렇듯 욕망을 드러내는데, 겉으로 보이는 다름을 눈치채는 순간 인간은 보다 표면적인 감정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푸른 뼈를 가진 종족과 마을의 멸망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어떤 경고의 메시지다. 푸르고 붉은, 때로는 노랗게 빛나는 뼈를 보석이라고 간주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은 인간의 속성과 본질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으로 멸망하는 것은 인간뿐이 아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의 욕심으로 멸종하는 종들은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욕심으로 이루어진 경계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환경을 나눈다. 그리고 흰 뼈를 가진 존재들만이 다른 이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정의했다. 푸른 뼈의 종족들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라제쉬가 목격한 끔찍한 장면들이 벌어지던 시간에도 흰 뼈의 사람들은 한곳에서 웃으며 피의 축제를 즐겼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푸른 뼈를 가진 자들은 멸망해야 마땅하다는 수십 개의 이유를 정의하면서.
한 아이의 생존
그러나 라제쉬는 살아남았다. 칼이빨 사냥꾼이 아이를 살려주었다. 하지만 그 일은 너무 어렸을 때의 사건이라, 소설의 초반에서 라제쉬는 마을의 기억이 삭제된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 오랫동안 닦지 않아 푸른 뼈는 그 색을 잠시 숨겼고, 그랬기에 라제쉬의 수명은 연장되었다. 철저히, 하지만 의도치 않게 목숨을 건진 이 아이를 세상은 여전히 ‘사고파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의 첫 장면은 라제쉬를 팔아버리려고 하는 한 남자와 데려가려는 여성의 대화로 시작한다. 자신을 ‘치과 의사’라고 소개한 여성 키란은 라제쉬를 이끌고 왜곡된 시선들로부터 잠시 도망친다. 라제쉬는 잠시 구출된다. 숲에서 머무는 시간은 둘에게 안정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나타나는 위험은 그곳이 꼭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라제쉬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기이할 정도로 아이를 공격하는 사람이 연이어 나타난다.
키란은 초반, 라제쉬의 보호자처럼 기능한다. 사실 라제쉬도 키란이 자신을,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이빨’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방어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키란은 훨씬 잔인한 사람이었다. 라제쉬의 일족을 멸망시킨 사냥꾼의 한 명이었으며, 자신이 죽이지 못한 아이를 왕에게 바쳐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일족이 멸망했다는 것을 깨달은 라제쉬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지나치게 깊은 절망은 때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도록 사람을 마비시킨다. 라제쉬 역시 그러했으며 도망가라는 키란의 말을 잠시 곧이곧대로 따른다.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던 자신의 보호자가 자신을 거래의 대상으로 봤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라제쉬는 끊임없이 그것을 의심한다. 라제쉬는 키란이 자신을 사랑했고 아꼈을 거라는 믿음을 좀처럼 버리려 하지 않는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아꼈다면.”
그리고 키란은 정말 라제쉬를 살리고 싶어했다. 아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그러했다. 한 마을의 모든 것을 뺏어간 죄가 단순히 한 아이를 살려주는 것만으로 용서되지는 않겠지만, 왜인지 독자로서 키란을 용서하고 싶어진다. 왕이라는 배후가 있음을, 그리고 그의 욕심이 이 모든 관계를 꼬아버렸기 때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제쉬는 키란에 대한 어떤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키란과 자신에게 안전을 제공했던 곳으로.
왕관의 주인으로서 라제쉬가 임명되었다는 결말은 뜻밖이었다. 일종의 비약이라고도 생각되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편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계수 작가의 세계에서는 그 또한 타당한 결말일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머리의 한 구석에서 피어올랐다. 멸망당한 일족의 마지막 아이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는 전개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라제쉬는 소설에서 사는 아이다. 불가능은 현실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작가가 구원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인물이 살아남는 곳이 가상의 세계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해도 될 것이다.
작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라제쉬를 잃지 않겠노라 마음먹었을 테다.
라제쉬가 왕관을 거머쥐는 그 순간이 바로 가장 큰 복수가 이루어지는 때가 되리라고, 작가가 결정하였으니 우리는 따르면 된다.
푸른 뼈의 왕이 즉위한 것을 기뻐하며 파티를 열어보자.
장편으로의 가능성
그러나 파티를 즐기기 전에, 이 작품은 단편으로서 완벽한 결말을 맺지는 않는다. 완결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에는 여러 부족의 인생이 얽혀 있다. 마치 한 장편의 도입이나 요약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세계에 너무도 밀도 있는 매력이 있기에 약간의 기대를 하며 작가가 생각지도 않았을 장편으로의 가능성을 멋대로 점쳐보려 한다.
1) 인물
소설의 세계관을 확장한다면 그 구역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왕의 편인 권력자들과 보석으로 된 뼈를 가진 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칼이빨 사냥꾼. 셋은 각기 다른 소원과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충분한 갈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왕의 편은 탐욕의 주체이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량 학살도 서슴지 않은 이들이다. 보석이라 불리는 뼈를 가진 이들은 그렇기에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왕의 명령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키란이 있었던 것처럼, 반드시 양심은 살아 있을 것이며, 이 양심이 잔인함의 종결을 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갈등을 만드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왕의 편과 색 있는 뼈를 가진 사람들의 마을, 또는 칼이빨 사냥꾼의 집단에서 각기 한 명의 ‘배신자’를 만드는 것이다. 어디에서 배신자가 튀어나올지는 독자가 결정할 문제가 아닐 테지만.
굳이 공동체와 등을 질 만큼의 배신을 하지 않더라도, 잘 짜여진 하나의 제도 속에서 싹트는 의심이야말로 큰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 되기 마련이다. 균열과 갈등은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연료와 같다. 앞에 제시한 것들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며, 작가에게 더 근사한 생각이 있다면 그 방향으로 인물들을 조직해보는 것도 좋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거시적인 세계에서 미시적인 인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기에, 그 방향으로 하나의 가이드를 제시해본 것이다.
2) 색깔 있는 뼈의 부족과 마법
그렇게 커다란 인물과 세계를 짠다면 부족의 갈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흰 뼈의 사람들과 달리 푸른 뼈의 사람들에겐 기다란 송곳니가 있다. 그렇다면 다른 색의 뼈를 가진 이들은 어떨까. 그들에겐 어떤 ‘특징’이 있을까. 뼈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는 흔하지 않다. 다만, 손톱은 뼈가 아니라 ‘각질’에 가깝다고 알고 있으니 이 부분은 단편에서 차용하지 않거나 생략하는 것이 소설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는 뼈에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암시를 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적어도 마법을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약속’이 존재한다.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 평쳐지는 이야기라면 그 흥미와 재미의 폭이 상당히 넓어진다. 아예 인간이 아닌 종족을 등장시킬 수도 있으며 마법의 방향으로 특출난 인물을 설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인간’의 것으로 남아야 한다고 느꼈다. 이미 인간 안에서 계층을 나누고 있는 어떤 무리에 대한 소설이기에, 마법과 색 있는 뼈에 중심을 두는 장편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큰 세계에서 더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라제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까. 장편의 장점은 다양한 빛을 가진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라제쉬와 키란, 아미타브뿐 아니라 궁전에 사는 사람들, 라제쉬처럼 살아남은 다른 마을의 아이, 또는 오래 전 학살의 반복, 학살의 내면에 숨은 또다른 이야기 등을 혼자 마구 상상하다 보니 장편으로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단편으로서 충분히 완결성을 가진 이야기에서 장편으로 확장될 뿌리를 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라제쉬는 작은 물에서 놀기엔 큰 ‘왕관’을 거머쥘 아이니까. 더 큰 세계를 선물하고자 하는 독자로서의 욕심이 구구절절 글자로 피어났다. 세계를 확장할 선택권은 작가에게 맡긴 채, 독자의 상상은 열린 결말로 두고 글을 맺으려 한다.
라제쉬와 키란, 잠시 등장한 아미타브, 색색의 뼈로 만들어진 기괴한 궁전이 주는 이미지는 결코 단편적이거나 밋밋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으며 이 작품을 알게 된 것이 하루의 시간 중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었다고 느낄 정도였다. 서계수 작가의 판타지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어느 배경으로 글을 쓰든 충분히 독자의 눈과 마음을 매혹시킬 작가라는 것에 의심이 없게 되었다.
그랬기에 오늘도 숨이 가빠오고 선을 넘으려는 몇 번의 아슬아슬한 기분을 다스리며 글을 마친다. 좋은 작품을 보면 일단 흥분을 하고 마는 급한 성격을 이번에도 주체하지 못했다. 라제쉬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었고, 키란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그들을 따라 푸른 여정을 떠나보려 한다.
거대한 권력이 빚어낸 참사에서 살아남은 아이,
그를 구해준 조력자와의 여행이 어디에선가 이어지고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