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자격의 정의-축일’ 회차까지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망국의 황녀님에게>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요정과 인간, 르난과 우미 족이 한 데 어우러져 이어가는 판타지의 탄탄한 전개가 매화를 고대하며 마음이 들뜨도록 만든다. 생생하고 따뜻한, 그리고 명랑한 이 세계를 놓치고 싶지 않아 오늘도 손을 뻗는다. 아이들과 르난의 모든 구역을 뛰어다니는 상상을 하며, 못된 어른들을 피해 이리저리 위로를 찾는다. 이 모든 제국의 지도와 사람들을 알았다는 것, 정엘이라는 작가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충분하다.
깨지지 않을 것만 같은 벨로타 제국의 완전한 수도 르난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그러나 위태롭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을 매끈한 옥으로 가려놓은 것처럼. 어쩌면 각각의 장은 정해진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분명하게, 이 소설의 끝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이며 그것이 모든 불안과 초조의 원인이다.
균열은 하나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한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딸’이 태어날 때, 모든 좋은 것들을 잃으리라
르난족에게는 하나의 신화가 전해진다. 일종의 건국신화나 마찬가지다. 모르세이가 르난에 터를 잡고 제국을 세우게 된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제국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깊은 진실을 아는 이 역시 거의 없다.
신화, 혹은 진실 중 일부로 보이는 프롤로그의 전개는 ‘홍성’이라고 불리는 이가 자신의 종족인 르난족을 지배족으로 삼기 위해 잔인한 살육을 벌였음을 암시한다. 홍성은 벨로타의 건국왕이며 단지 그의 종족이 세상의 지배족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어린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을 살해한다. 그는 자신의 딸 역시 “평생 도구로 이용”했으며 심지어 그녀를 르난족의 순수혈통을 잇기 위해 “가축”처럼 대했다. 그랬기에 벨로타는 모든 종족의 멸망을 눈으로 본 이후, 자신의 아버지 홍성을 향해 마지막으로 저주를 말한다. 제국의 모두가 복을 누릴 것이나, “지배혈통에 딸이 없을 것”이라고. 딸이 없으리라는 저주는 무엇을 의미할까.
홍성은 르난의 순수혈통이 세계를 지배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여성을 그저 ‘생산도구’로 바라보았다. 벨로타는 이 거대한 욕망에 대항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소원을 빈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난 지배혈통의 딸들이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에 대한 저주가 반드시 그 땅에 임하기를 바라며 벨로타는 저주를 내린다. 요정왕 수르피나는 벨로타의 저주를 수락하고, 아버지에게 저주를 내린 대가로 억겁의 세월동안 죄업를 갚아야 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제국의 ‘수호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수호신은 본래 제국의 영광과 존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만, 벨로타가 온전히 ‘수호신’만으로 존재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프롤로그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아마도 벨로타는 아버지의 제국이 가장 번성한 어느 순간에, 저주를 내리는 주체로도 작용할 것이다.
프롤로그에는 상당히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우미족의 푸른눈을 가진 세이스는 벨로타와 사랑했으며,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세이스는 건국와 홍성의 비뚤어진 욕심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 이 부분에서 르난족과 우미족의 갈등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벨로타와 요정왕의 관계 역시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과 요정이 우정을 쌓는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요정왕과 벨로타의 관계 역시 소설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풀릴 이야기 중 하나다.
벨로타는 자신이 사랑한 세이스의 죽음 때문에라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려진 저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벨로타 제국력 1200년이 되도록 르난족은 대단한 영광을 누린다.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로, 강성하고 단단한 나라로 서는 동안, 홍성과 같은 이들이 벨로타 제국에 그득그득 차올랐다. 르난족은 홍성의 욕망대로 거의 세계의 지배족이 된다. 푸른 눈의 우미족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그저 ‘순수혈통’을 갈망하며 제국의 힘을 길러나갔다. 신기하게도, 르난족의 지배계급에 여자아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언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황족의 모든 여자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으로써 벨로타의 예언은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자네는 정말, 이렇게 길게 이어진 마르미트 황가의 적통 계승자들에게 단 한 번도 딸이 태어난 적이 없었을 거라고 믿었나.”
‘순수’를 좇는 행위란 대단히 위험하다. 이상적인 순수는 없음에도 그에 가닿기 위한 욕심은 때로 비뚤어진 방향으로 향하기 마련이기에. 이룰 수 없는 이데아를 끊임없이 갈망하며 푸른 눈동자의 색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운 없”는 이로, 하인이나 그밖의 낮은 존재로 대하는 이들은 맹목적으로 왜곡된 건국신화를 믿는다. 최선을 다해 지배혈통인 귀족들을 따르는 르난 족. 벨로타의 저주가 슬며시 지워진 채,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꾸며져 내려온, 진실이 가려진 건국신화가 만들어낸 이들의 속성을 순화시켜 “신실하다”고 부르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이들이
이렇듯 어른들의 재미없는 투쟁과 다툼이 지난하게 계속된다면 이 소설은 피튀기는 정쟁 갈등으로 점철된 판타지가 되겠으나, 다행히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소설의 초반부터 들리기 시작한다. <망국의 황녀님에게>에서 어른과 아이의 대비는 극명하며 한 쪽은 끝없는 욕망을, 다른 한 쪽은 우정과 사랑을 따른다. 아이들의 맑고 밝은 웃음은 소설 전체 분위기의 균형을 맞추고 정쟁과 저주의 신화에서 독자들이 조금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정한 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이들 중 쌍둥이의 탄생은 비범하다. 지배혈통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황녀님이 태어났기 때문이 먼저일까. 1200년이 되도록 지배혈통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남자아이와 함께 잉태되었기에 여자아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황실에서 쌍둥이의 탄생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지만, 누구도 마음 편히 황녀의 태어남을 기뻐하지 못했다. “고위 신관들”의 “긴급회동”이 이루어졌고, 소바르 황제는 꾸밈 없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마음 역시 편하지 않았다. 벨로타의 저주를 알고 있는 고위 귀족과 지배계급은 황녀의 탄생으로 인해 전례없는 대위기를 맞는다. 제국을 망하게 할지도 모르는 아이의 탄생을 드러내어 좋아하는 이는 없으리라.
황궁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가 등장한다. ‘다르샤’라는 이름의 우미족 아이다. 자작령에서 고아원으로 보내진 다르샤는 그곳에서 길러진다. (자작령이라는 지명을 통해 다르샤 역시 심상치는 않은 신분의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쌍둥이 에르타와 로쟈, 그리고 다르샤의 시작은 어쩌면 흔히 말하는 ‘다른 출발선’에 존재한다. 셋은 전혀 한 곳에서 만날 수 없는 계급과 종족을 타고났으며, 편협한 생각으로 가득한 어른들이었다면, 르난족 황가의 사람 두 명과 우미족 고아 출신이 함께 친구로서 관계를 맺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앞에 서서 해사하게 웃는 이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어림의 장점 중 하나는 ‘편견’도, ‘차별’도 없다는 것일 테다.
다르샤와 에르타, 로쟈의 만남은 두메질 황후가 아이들을 대동하고 보육원에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에르타와 로쟈가 다르샤를 만나는 과정은 매우 매끄럽다. 마치 지금의 어린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사귀듯. 르난 족의 황자와 황녀가 “파란눈 도깨비”라고 불렸을 다르샤의 손을 덥석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만 어색한 광경이었다. 어떤 색안경의 방해도 없이 세 아이의 사귐이 이루어진다. 새로운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에르타와 로쟈는 다르샤를 기어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황궁으로 데리고 간다. 그렇게 다르샤의 황궁 생활이 시작된다.
당연히 푸른 눈의 우미족이 르난의 수도 중심인 황궁에 근무한다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다르샤는 황궁에서 거의 매질을 당할 뻔하는 사건까지 겪으며 차별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다르샤가 최고의 위기를 겪는 바로 그때, 마지막 아이 ‘세자롬’이 세 아이의 앞에 등장한다. 다르샤를 “간악한 우미 혼혈 하녀”라고 부르는 이 무례한 신관은 나름 최연소 신관 후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유명인사다. 그러나, 다르샤는 세자롬의 코를 보기좋게 누른다. 모든 난리가 한바탕 지나간 후, 놀이친구의 목적으로 방문한 세자롬은 명랑한 에르타, 로쟈, 그리고 다르샤와 친구의 연을 맺는다.
세자롬의 등장은 갑작스럽지만 당장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르샤의 존재가 신관인 세자롬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빚을 수 있다. 세자롬은 건국신화의 내막을 대해 알아야만 하는 ‘신관’이지만 황녀와 인연을 맺었다. 소설이 흘러감에 따라 세자롬은 자신의 친구인 에르타에 대해 한 번 이상의 큰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거라는 예측은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역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관문이리라.
르난족의 황족과 최연소 신관 후보, 그리고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우미족 푸른 눈의 아이. <망국의 황녀님에게>는 네 명의 아이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제국이 망하든, 망하지 않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멸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떨림을 가지고 소설을 편다. 지금까지는 따뜻함 속에서 소설을 덮었지만 언젠가 마주할 균열과 갈등 안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방향과 맺어갈 결론을 알고 싶다. 훌쩍 자란 아이들이 결국 가닿을 끝을 보고 싶기에 이 소설을 오늘도 놓지 못한다.
플롯과 소설의 매력
나는 이 소설의 감상을 글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중도를 지키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완전히 이 소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으나,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이유는 작가의 유려한 문장 때문이다. 어떻게 이토록 촘촘하고 밀도있는 전개를 이루면서도 독자의 눈과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가. 정엘 작가는 이미 소설의 문체로서는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듯 보인다. 물론 비문과 오문이 소설의 중간중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빈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여러 맞춤법 프로그램을 이용한 퇴고를 한다면 문장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으며 오류는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것이니 줄여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사로운 실수가 아닌, 크고 전체적인 매력이다. <망국의 황녀님에게>의 첫 회차를 읽자마자, 그 문장의 결을 만든 사람이 누구든, 그의 열혈독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모든 회차를 감격에 겨워 읽었다. 이미 중간으로서의 기준을 잃은 것 같으니 오늘은 좀 황홀에 벅찬 마음으로 리뷰를 써보아도 될 것이다. 장면과 장면의 긴밀한 연관, 흐름에 막힘이 없는 전개를 가진 이 소설에서 예사롭지 않은 대작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사를 이용한 상황의 암시, 신화와 현재가 맺는 긴밀한 연관성, 인간계에 사는 요정 등 타종족의 적당한 언급(라능과 다르샤의 만남은 어떤 암시를 명확하고도 조용히 내보내는 장면이었다), 차별과 이겨냄 등을 적절한 농도로 그리는 작품을 읽는 내내 아이들과 함께 벨로타 제국의 수도 르난에 있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은 소설의 초입이라 작가의 의도에 대해 모두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상 역시 몹시 단편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르샤와 세자롬의 대립적인 관계에서 꽃피는 우정, 어른들의 세계에서 비밀리에 퍼지는 망국에 대한 예언, 르난족과 우미족의 대립,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느껴지는 벨로타 제국이 밤과 낮을 보내며 어쨌든 이어가는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갈지는 분명히 기대가 된다.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의 과정과 결말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좋은 아이들을 만났노라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걸 믿어 의심할 수 없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태어나 처음 읽은 판타지 장편 소설이 <룬의 아이들> 시리즈였다. <망국의 황녀님에게>는 룬의 아이들 시리즈와 대단히 비슷한 매력이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어른의 세계를 꼬집는 것. 어른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을 아이들이 바로잡는 것.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가질 때 비로소 소설의 진짜 맛을 알 수 있다는 것. 무엇에 가두어지지 않은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작품 안에서 생생히 들린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이 흐르는 어떤 공간이 부서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아이들은 결국 모든 어른보다 어른스럽기 때문일까.
그러니, 따뜻한 망국의 황녀님에게
로쟈와 에르타, 다르샤와 세자롬이 르난에서 펼칠 모험을 매일 따라간다. 벨로타가 남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가 이 소설의 명백한 클라이막스라는 것을 알고도 그 과정이 지난하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황국은 망할 것인가 망하지 않을 것인가는 신기하게도 지금에 와서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드는 이 마음은 어느 독자들이나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아직 초입인 이 소설을 무엇으로도 단정짓고 싶지 않으며 작가에게 그저 글을 쓸 힘을 부어주고 싶다. 한 명의 독자로서. 아이들과 르난의 분위기에 취해버린 이로서. 중도에 그치치 않아야 하는 황녀의 여정에 동무가 되는 마음으로서 말이다.
어린이들의 명랑한 목소리가 소설 안에서 분명히 꺾일 위기가 올 것이다. 빛이 꺾인다는 건 잔인하지만 어려움과 고난이 때로는 누군가를 성장시키기도 하므로. 나는 어떤 상황이 닥치든 무언가가 아이들을 구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건 아마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망국의 원인이 될 황녀님에게 내가 바라는 한 가지는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잃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에르타와 다르샤, 세자롬의 세계가 온전했으면 한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의 방향은 분명한 작가의 자유이기에 나는 나름의 방법대로 아이들의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힘써 모색해야겠다.
그러니, 일단은 따뜻하고 명랑한 망국의 황녀님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오늘도 손을 내밀어본다.
네 명의 아이들이 걸어갈 그 어느 길에서 망조가 깃들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