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로 지은 사람>은, 공장 폭발 사고로 죽은 동거인을 애도하는 이야기다. 어떻게 애도하냐면, 온갖 빵과 양과자를 만들며 애도한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다. 주인공과 동거인의 사랑 그리고 이들이 겪어낸 현실에 대한 증언은, 주인공이 제과를 하는 과정 사이사이로 앙금처럼 비집고 나온다.
1) 사람을 위해 불러낸 환상
판타지 소설은 아니나, 작품을 가득 채운 환상적 이미지와 온갖 은유는 소설을 하나의 환상 문학처럼 읽히게 만든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판타지물이 있다. 때로는, 현실을 통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 앞에서 너무나 쉽게 판타지를 불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환상이란, 꼭 필요한 순간에 쓰일 때 진정 빛나는 장치다. 환상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 어떨 때 이야기는 간절히 환상을 불러내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너무나 말하고 싶을 때, 말해야 할 때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전해져야만 하는 진실은, 그대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 아프고 차가운 경우가 많다.
사랑하던 이가 죽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을 섞고 살았다. 그가, 일 하던 중 사고로 죽어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를 막지 않은 사람 중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세상은, 내가 그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이야기다. 그런 현실이다. 작중 인물이 겪었을 폭발 사고 현장의 처참함과, 피해자들이 겪었을 극도의 신체적 고통과 공포는 ‘오븐에서 구워지는 반죽들’이라는 은유적 장치로 표현된다. 어떤 비유와 환상은, 현실을 향한 인간적 예의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어떠한 위로와 보상도 받지 못한 이의 찢기는 심정은, 양과자를 제작하는 행위 하나하나의 묘사를 통해 설명된다. 어떤 비유와 환상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한다. 힘을 가진 비열한 이들의 민낯은, 산타와 진저맨이라는 동화적 인물로 표상된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눠주는, 무해해보이는 인물들. 그러나 그들은 사랑하는 이를 찾으러 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시신-책임-을 뒤로 빼돌린다. 이미지간의 이 간극은,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렬한 폭로다.
2) 환상 너머 그 사람이 남긴 것
‘나’는 ‘너’를 기억하기 위해 과자를 짓는다. 아니, 과자로 너를 짓는다. 너는 내 뱃속에 살아있는 무언가를 남겼다. 나는 이제, 네가 남긴 것들을 과자로 만들어 너와 같은 이들에게 나눠준다. 그들의 뱃속에 따뜻한 네가 남도록. 이것은 어쩌면 ‘나’와 작가가 함께 하고있는 일인지 모른다. 주인공이 빵과 과자를 만드는 과정의 서술은 온갖 환상적 이미지와 묘사로 가득 차 있지만, 이 행위의 이유와 결과는 한없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은 끝없이 ‘너를 구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이고 꿈일 뿐이다. 그곳으로 건너갈 수 없어서, 대신 현실에서 네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과 이야기는 슬픔을 묵직하게 머금고, 가장 높고 낮은 곳 모두에 흩뿌려진다. 환상 너머 그가 남긴 것이다.
소설에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반복해 등장한다. 작가와 주인공은, ‘너’를 기억하기 위해 충분히 슬퍼한다. 슬퍼하며, 슬픔을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를 짓는다. 성경은,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 복은, 어떤 고통도 없는 안락한 방에서 배불리 먹는 복이 아니다. 가장 비천하고 타는 냄새가 가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평안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복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생각해본다. 평안이란 무엇이며, 재미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야기의 ‘재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물으면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다만 ‘전기가 흐르는 꼬마전구나 일하는 아동들이 만든 오너먼트’와 같은 환상이 걷힌 자리에 남은 한없이 생생한 현실과 사람 역시 누군가 느끼는 이야기의 가치에 포함될 것을 믿는다. 환상은 깨지고 현실은 남는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현실과 맞닿으며 확장되는 순간에 환상은 가장 환하게 빛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영원히 슬플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이야기는, 산 사람을 위해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죽음의 슬픔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