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는요, 적어도 서로를 물지 않아요…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창백한 말 (작가: 최민호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랜돌프23, 20년 9월, 조회 202

<ZA 문학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라니,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서 읽어보니, 흐음, 이 정도를 써야지 대상을 타는구나 하는 감탄 섞인 자아성찰(?)을 느꼈습니다.

제가 좀비 문학에 대해서는 해박하지 않아서… 아니, 사실 좀비 영화 말고 좀비 문학이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당시 그쪽 트렌드라든가 장르의 변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보편적인 이야기를 떠나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사건이 진행되는 시점과 배경 자체가 상당히 흥미롭고 예상밖이었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ZA)라고 하면 일단 떠오르는 이미지는, 갑자기 사건 발생, 퍼져나가는 좀비들, 아비규환이 된 도시, 대혼란, 붕괴되는 문명, 피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협동과 반목, 총으로 좀비 머리 빵빵, 전기톱 웨에에에엥, 정 없으면 골프채로 때려잡거나 불법개조된 차량으로 밀어버리는…. (그리고 꼭 좀비 때려잡으려다가 아군을 잡거나 자기 몸을 자르는 사람이 나와야 함)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ㅋㅋㅋ

그래서 ‘대상을 탄 작품이라니, 그런 것들을 어떻게 묘사한 걸까?’하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내용에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그런 멸망과 붕괴, 사건의 발발과 좀비의 무자비한 습격의 공포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좀비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생존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내용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존>이 그려져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건 좀비의 이빨을 피해, 뜯어먹히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를 유지하고, 돈을 벌어, 약을 타먹는 생존…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는 생존… 그리고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려는 생존… 그리고 소설 속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건 좀비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약자들은 약자들끼리 서로 공격하고, 강자는 약자를 깔아뭉게고, 운 좋게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 면역자들은 그걸 기득권으로써 보유자들에게 차별과 박해를 행합니다.

경제적 논리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정부와 기업과 군(사실 정부와 군이 같은 존재인 것 같은 세계관)은 서로 유착해서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에 약자들은 죽어나가고, 또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약자들을 마구 죽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에 대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누구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낯설지 않은 모습들입니다. 너무 익숙한 풍경들입니다. 읽으면서 쓴물이 목구멍 위로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좀비때문이 아니라, 좀비를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석호라는 인물입니다. 저는 이 인물의 성격과 태도가 소설에서 큰 중심주제를 차지한다고 봤습니다.

석호는 위선자입니다. 아랫사람들… 말하자면 ‘보유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려는 모습이 초반에 나옵니다.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면 이런 태도가 이상하게 뒤틀려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석호는 보유자들은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랫사람으로서’ 대우해주는 것이었죠. 자신이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유지한 상태에서, 마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인간 대접도 못 받지만 나는 해준다’라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지만, 그건 자기만족형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아랫사람이 자신과 동등해지려는 것, 까부는 것, 주제 넘는 짓을 하는 것에 분개를 합니다. 정말로 사람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네가 감히’라는 말이 안 나올 겁니다. 어차피 넌 못 받아 마땅한 걸 내가 줬으니 감사해야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죠.

이는 정말로 그 입장이 되어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역지사지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 에 대한 물음을 던져줍니다. 석호뿐만 아니라 다른 면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면역자들이 전부 나쁘다는 흑백논리의 일반화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정녕 가능한지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자신은 ‘포비아’가 아니라고, 자신은 교양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석호조차 그 이면에는 편견과 계층의식이 있었으니까요. 평등에 따라오는 건 쌍방소통입니다. 하지만 석호는 쌍방소통을 열기보다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걸 좋아합니다. 쌍방소통 없는 이해는 편견 위에 위선을 칠해놓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석호는 소설에서 내내 ‘진심어린 사과’를 운운한다는 겁니다. 사과는 진심이 담겨있어야 한다고, 정말로 잘못한 게 뭔지 깨달은 상태에서 해야 한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볍게 사과하는 것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석호는 수진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입에 발린 말로 사과할 수 없다는 것이죠.

명분은 그럴 듯 합니다. 사과에 진심? 중요하죠. 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분명히 뭔가가 잘못되어서 피해를 입었는데 악역과 원인이 분명하지 않아서 화살을 어디에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에게는 ‘형식적인 사과’라도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저 이야기를 조금 들어주는 것, 그리고 공감해주는 것,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과를 하는 것… 환자가 결국 사망했을 때, 유가족에게 의사가 고개를 떨구고 죄송하다고 말하는 건, 정말로 의사가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사과’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위로의 의미도 들어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I’m sorry가 ‘미안하다’와 ‘유감이다’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는 것도 같은 이치라 생각됩니다. 한국어로 보면, ‘미안하다’에서 ‘미안’은 한자로 未安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수진이 사과해달라고 했던 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공감해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했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석호는 사과를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석호가 정직의 도덕을 중시한다기보다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싫어서 고집부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중반부에 가면서 석호라는 인물이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비도덕적인 일들을 벌이는 게 나오거든요. 내로남불이라고 할까요… 결국 위선이고 가식이자, 그럴듯한 명분 포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석호는 상술했듯 쌍방소통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수진의 이야기도 경청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모두가 잘못한 거라고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죠. 하지만 그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일조한 사람에 석호도 들어가있습니다. 결국 책임을 분산시켜 묽게 희석시킨 후, 모두가 잘못했으니, 아무도 사과할 수 없다는 얘길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석호의 철학이, 마지막의 석호의 최후와 어우러지며 아주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석호의 아들은 수진에게 물려 좀비가 되고, 석호도 물려 좀비가 되고, 그렇게 석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진이 석호에게 사과를 해야 할까요? 그 바이러스가 면역자에게도 듣는다는 걸 몰랐는데요? 수진이 먼 길을 돌아 석호에게 와 감염시킨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도와 결정(석호 자신의 의도와 결정도 포함)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소설에서 ‘운전사’와 ‘트럭’의 비유가 나오듯, 결국 수진도 한 대의 트럭이 되어 누군가의 운전에 의해 돌고돌아 석호 앞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석호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 말을 듣고 계단 위로 올라갔었더라면 물리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서 제가 석호의 아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면 몰상식한 걸까요? 그렇다면, 자신의 딸을 잃은 수진을 메데이아라고 부르는 석호의 태도는 뭘까요? 수진이 자신의 딸을 잃은 건 순전히 수진의 잘못일 뿐인데 남탓한다고 여기고 있잖아요? 석호 말마따나, 자신의 아들이 좀비가 된 것도, 자신이 아들에게 물려 좀비가 된 것도 그저 ‘안타까운 사고’일 뿐인 겁니다. 아무도 그걸 작정하고 의도하지 않았어요. 사회 모두가 이뤄낸 결과니까, 약을 가지고 장난 친 정부와 기업, 면역자에게도 듣는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퍼뜨린 조직 등을 포함해 모두가 잘못한 거니까, 결국 아무도 석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기 아들 손에 죽은 미영의 경찰 수사 결과처럼요. 석호는 그런 상황을 납득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좀비가 사람을 무는 게 아닌,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소설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내용을 다시 곱씹어보니 그 맛이 쓰디 쓰네요. 읽으면서 좀비 아포칼립스로부터 인간 문명을 지켜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독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저딴 문명이 살아남을 바에는, 그냥 다 멸망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 정도로 작가님이 분노를 적절하게 자극해주셨습니다. 좀비가 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으려 했지만, 저열한 인간성만 살아남은 이야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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