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가 읽은 소설 중 주인공이 가장 많은 살해 시도를 겪은 작품입니다. 다행히(?) 주인공은 불사입니다. 요정이 바꿔치기 한 아이, 체인질링인 주인공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금지(禁地)로 여정을 떠납니다. 그런 주인공, 주릴의 여정에 유사-기사 남주 네키르엘이 함께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죠. 남녀 주인공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앞서 말했듯 주릴은 불사니까요) 열렬히 입씨름을 벌입니다. 로판인 만큼 로맨스도 있습니다. 얘네는 도무지 사귀지 않네… 할 때쯤 로맨스가 나옵니다. 리뷰는 처음입니다. 그런 고로 리뷰답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아주 특이한 경로로 접했습니다. 작가님이 트위터에 올리신 퀴즈를 찍어 맞추고 나서 소설을 읽은 것이죠. 서장(개정판이 아니었습니다)을 읽으니 주인공의 특수성과 고립을 벗어나는 장면이 무척 취향이어서 최신 편까지 다 읽었습니다. 따라서 이하 내용에는 작품의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릴과 세 개의 탑(이하 주세탑)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정체성과 운명이 주인공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다루는 피폐힐링로판성장소설. 주인공부터 무척 특이합니다. 체인질링. 구글에 [판타지 소설 체인질링]으로 검색하면 1 페이지에 이 소설이 나올 정도로 생소한 주제죠. 주릴은 읽은 책을 몽땅 기억할 수도 있고, 심장을 꺼내도 다시 심장이 자랄 만큼 탈인간적인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였다면 흔한 먼치킨이었겠지만 주릴은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맺어본 적 없어 대인관계능력도 엉망이죠. 툭하면 자책하고 걸핏하면 환청을 듣습니다. 그런 주릴과 어찌 어찌 따라다니게 된 소년, 네키르엘은 숙적에게 쫓기는 처지입니다. 검술과 가문에 자부심이 있지만 어릴 적 기억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칭 기사라며 하는 일은 기사 작위를 받다 만 거 같습니다. 이 둘은 사건사고를 치고 세상을 휩쓸고 다니면서도 계속 입을 나불거립니다. 대화를 보는 게 이 소설의 주된 묘미입니다. 대화가 길어져도 늘어지거나 이상해지는 일 없이 즐겁죠. 주인공들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존재인 요정들을 만납니다. 요정들이 등장하면 판타지스러움이 30% 정도 증가하는 느낌입니다. 요정들의 비인간성은 무서우면서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인 제 입장에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요정들은 주릴을 ‘엘렛사’로 여깁니다. 주릴은 난생 처음으로 환대와 편애를 받습니다. 주릴이 알레아에게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인상깊었습니다. 요정은 외모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예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존재들이고, 그런 알레아가 주릴을 안심시켰습니다. 작중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미모가 전부 빼어나지만 주릴만 끔찍하니까 대비되는 부분도 몇 있었습니다. 네키르엘이 카야한테 반할 뻔한 부분이라던가. 물론 네키르엘은 주릴의 히로인입니다. 그 점과 관련해서, 그리고 작가님도 무척 중요한 주제라고 하신 외모지상주의가 있죠. 주릴은 희한하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콤플렉스로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으면서 외모가 나아지는 자신을 부정합니다. 주릴이 생각하는 “주릴”의 속성이 추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릴은 애초에 왜 그렇게 못생겼던 걸까요? 주릴이 요정이라면 못생길 이유는 없고, 평범한 인간이라면 평범한 얼굴을 지녔어도 괜찮을 듯 한데 말이죠. 뭔가 이유가 있을 듯 하니 엔딩을 기다립니다. Ch.10-13에서 주릴이 자유를 외치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주릴은 네키르엘도 지적했듯이 스스로를 탓하고, 자신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으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없애고, 버리고 싶은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억압을 끊어내는 장면이 무척 멋있었습니다. 개정판 서장과도 금방 연결되고요. 하지만 그 장면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릴이 그 직후 각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변했지만, 정체성 혼란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그러면서도 1장에서 주릴과 요즘 주릴을 보면 무척 다릅니다. 성장했죠.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요. 주릴의 변화는 주릴의 고민보다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세계의 축이라고 불리죠. 하지만 주릴은 아직도 자신이 정확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네키르엘은 기사라 자칭하며 부모님과 숙적이 얽힌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기억. 그 기억과 부모님의 유언을 따라 수 년을 살아왔지만 주릴과 다니며 자신의 기억이 이상하단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네키르엘의 숙적 베리칫 그라나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네키르엘을 마주쳐도 여흥이라며 놔주고 굶었다면 최상의 상태로 보자고 밥을 먹입니다. 영계 키워서 복날에 잡아먹는 닭 주인도 아니고 왜 그러는 걸까요. 네키르엘의 운명과도 관련있는 부분인 듯 싶으니 지켜보겠습니다. 네키르엘은 이상한 마을에서 ‘좀비’와 싸우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주릴과 모쉬나를 보는 네키르엘의 관점이 보여서 흥미로웠습니다. 네키르엘이 강한 걸 재차 확인도 했고요. 대사로는 Ch. 4-7편에서 카야가 “네키르엘은 그동안 피를 많이 봤을 테니까 여기 피를 닦아주고 주릴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저쪽 방에 있는 침구를 정리해주렴.”이 인상깊네요. 주인공들의 삶을 단번에 정리하면서 요정의 특성까지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일종의 개그라고 생각하는데 저 대사와 주인공들의 반응에 정말 웃었습니다. 남의 트라우마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니고 항상 신랄한 말솜씨를 뽐내던 아이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공격받자 당황하는 게 귀여웠습니다. 아쉬운 점도 몇 있습니다. 일단 연재 중이라 한 편씩 읽고 있으면 예전 편에서 나왔던 복선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근데 이 점은 단행본으로 읽으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점은 주릴을 “주릴”이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주릴은 “주리다 죽을”에서 파생되어 호칭이 주릴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주리다는 한국어죠. 다른 이름들과 위화감이 있습니다. 네키르엘은 사실 주릴을 “주릴”이 아니라 레니아테 대륙 말로 “주릴”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사계절도 따로 명칭이 있는 소설이라 살짝 어색했습니다. 그 외의 아쉬운 점은 없으니 이번에는 좋아하는 점을 나열하겠습니다. 주인공이 구릅니다. 저는 주인공이 구르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고난과 갈등의 연속인데 주인공은 특별하다는 이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거리감이 듭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세탑이 초장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고생합니다. 이질적이기 때문에. 저는 주인공이 이질적이라 고생하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별한 당신, 굴러라! 다양한 판타지가 섞여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안티렐 숲 초반에는 무척 신기했습니다. 원작이 따로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럽풍인데 원서(=한국어)로 읽고 있다는 점이 묘했습니다. 외국 소설이나 번역본보다 이해가 더 직접적으로 되니까요. 주세탑을 읽고 있으면 이 작품에 대한 작가님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특히 저는 설화나 전설을 굉장히 좋아해서 아는 괴물 나올 때마다 기뻤습니다. 특히 루살카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인공들 한 마디도 안 지는 것도 정말 귀엽습니다. 일단 말 잘하는 캐릭터라고 하면 독자들한테도 그렇게 비춰져야 하니 한 명만 있어도 쓰기 어려울 것 같은데 대부분의 캐릭터가 한 말빨 하니 서로 의견이 부딪치는 게 정말 마음에 듭니다. 각자 그럴 듯한 의견과 논리를 전개해서 한 쪽 편만 들어줄 수 없는 점이 좋습니다. 그리고 진현이 다른 스토리라인에서 나온 것 같은데 훌륭하게 분량과 입담을 챙기는 것이 즐겁습니다. [레니아테 내셔널 지오그래픽 3대 금지(禁地) 여행기]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자연 묘사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리 없는 곳에서 펼쳐진 광활한 장경이나 마법이 일렁이는 풍경 같은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 모릅니다. 카자드니 호수 장면에서 네키르엘이 고생할 때의 장소 묘사는 자주 읽습니다. 주세탑은 언어와 의지, 그러니까 염원이 중요한 세계관입니다. 네키르엘의 검도 의지로 전승된다고 하며 요정의 힘은 염원과 의지가 중요하고 언어로 제약받죠. 그러니 주릴이 무엇을 바라는가,도 정체성과 더불어 고려해봐야 합니다. 초판본 주릴은 서장에서 “죽으러 간다.”, 정확히는 “내가 죽을 수 있는 지 알아보러 간다.”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개정판에서는 이 부분이 “정체성을 찾으러 간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초판 주릴도 죽으러 간다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주릴은 세계의 축이라는 운명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선택권도 있습니다. 가령 비가 내린다는 운명이 있다면 비를 맞을 지, 우산을 쓸 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할 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주릴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선택을 할 지 기대됩니다. 이 소설 최대의 의문은 주릴의 정체입니다. 네키르엘의 과거는 곧 풀릴 듯한 느낌이고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주릴의 이야기니까요. 주릴이 누구인가, 그건 주릴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릴은 생각해보면 다양한 호칭으로 불립니다. 멸칭인 샤미엄부터 체인질링, 엘렛사, 주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자기 이름은 아닙니다. 주릴은 자기 이름은 주릴 베르딘이 아니라 주릴이라고 했지만 주릴도 자기 이름은 아니죠. 주인공이 주려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담은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주릴의 이름은 주릴이 지어야 하는 걸까요? 주릴에게 진명이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에 주릴은 세계의 변화 때문에(를 위해?) 생긴 거니까, 스스로 정의를 내릴 겁니다. 왜냐면 주릴은 선택하는 존재니까요. 뭘 하던 주릴과 네키르엘에게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이지 말아주세요 둘 다… 네키르엘 팔 하나 정도는 잘라도 괜찮습니다. 얘네 맨날 육포 씹으면서 연애해서 안타까우니 둘 다 위험하지 않은 데서 따듯한 밥이나 함께 먹으며 투닥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파국 피폐 엔딩도 좋아하나 주세탑은 배드 엔딩이 나면 세상이 무너질 위기에 처할 것 같아 해피엔딩을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엔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소망이나마 담아봅니다. 어떤 엔딩이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건 작가님의 이야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