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문자>는 파란약 작가의 첫 작품이다. ‘첫’이라는 말에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이 ‘출발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번 리뷰는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완전한 독자의 시선에서 적어보려고 한다.
소설 <거울문자>는 독특한 작품이다. 살인범과 모방범에 대한 정보를 소설의 초반에 모두 제시하고 출발하지만, 흥미롭게도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강약이 꽤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다. 문체와 문장이 아닌 흐름만 보자면(문장과 문체에 대해서는 리뷰의 후반부에 이야기하겠다) 첫 작품이 아니라고 보아도 될 만큼 인물과 상황의 설정에 흥미로움이 많았다. 개인적인 의견을 더하자면 파란약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그렇기에 보완점보다는 가능성에 집중해보자.
누가 죽이는가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인물’에 있다. 소설에 정확히 필요한 인물만, 군더더기 없이, 모자라거나 남음 없이 배치되어 있다. 심장살인마와 모방범, 최서후와 류청하의 대립과 연대 구도는 확실하며 그 외의 서브 캐릭터도 낭비되지 않은 채로 작품에서 제 기능을 한다. 캐릭터의 성격 역시 일관적으로 유지된다.
파란약 작가의 첫 작품에서 보이는 가능성은 ‘인물’이다. 400매의 장편에서 인물의 성격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기는 쉽지 않기에 <거울문자>가 첫 소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파란약 작가가 가진 인물 배치의 장점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까. 첫째로 각 인물의 ‘서사’를 파악하면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최서후가 심장살인마가 된 이유는 정말 엄마 때문일까. 사람을 죽이면서 위험한 상황이나 변수는 없었을까. 류청하는 왜 모방범이 되었을까. 모방범으로서 추리소설 작가라는 직업이 위험의 요소가 된 적은 없을까.
소설을 읽으며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런대로 사용하면 되지만, 정말로 머리에 박혀 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은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활용해 (특히 장편에서) 인물의 생애를 정리하는 작업이 동반된다면 밀도 있고 풍부한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인물의 ‘배치’ 면에서는 ‘관계도’가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거울문자>에서는 적재적소에 무난한 인물이 배치된 반면 이렇다 할 큰 변화를 겪거나 뚜렷이 큰 특징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럴 때에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 ‘우호자’와 ‘적대자’를 정하면 좋다. 큰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는 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중간에는 누구를 놓을 것인가 등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인물 설계에 구조를 더한다.
왜 죽이는가
‘살인’이라는 행위는 분명 크고 분명한 색을 지닌 단어다.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상 최서후가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적절한 이유가 필요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인의 이유’르 만들었고 특별히 어긋나는 부분 없이 이에 끼워 맞춰지는 이야기의 진행이 매끄러웠지만, 이는 자칫 작품의 특징을 모호하게 할 수 있다. ‘심장살인마’라는 살해 유형이 굉장히 독특하기 때문에 이에 걸맞는 ‘살인의 이유’에도 방점을 찍으면 <거울문자>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데 어머니의 죽음을 보다 특별한 사건으로 설정하거나 살인의 이유를 아예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연쇄살인’을 일으킬 정도로 큰 사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살인이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뉴스 등의 언론 보도를 통해 우리는 기상천외한 살인을 접할 수 있으며 이는 최서후의 살인 동기에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방향을 정해줄 수 있다. 죽음을 향한 어머니의 투쟁을 그대로 소설에 사용하는 것도 좋다. 그로테스크하게, 기괴하게 뒤틀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극한의 평온함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죽음에 대한 충격을 심화시킬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의 동기를 뚜렷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서후가 사람을 죽일 때에 극한의 잔인함을 예술로 승화하는 것을 활용해도 좋다. 읽다 보니 최서후가 어머니의 시신을 괴이하게 치장하는 장면이 실제로 들어가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인의 동기가 죽음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은 어느 방향으로든 특별해야 한다.
누구를 죽이는가
살인의 동기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이 향하는 목적지이다. 동기가 있다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최서후가 살인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은 더 넓은 지평으로 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삽입하여 내용을 이어가기에 가장 무난한 것은 몇 가지 ‘사회적 논제’다. <거울문자>에도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 몇 개 등장하지만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느낀 것은 ‘원장’ 에피소드였다.
원장의 딸과 그를 심장살인마와 모방범이 협동해 살해하는 부분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소설 안에서 중요한 변화의 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한동안 이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병원장의 에피소드처럼 함께 등장하면 좋을 만한 여러 다른 ‘희생자’를 정한다면 소설은 더 확실한 색을 가질 수 있다. ‘살인마’를 등장시키고 보여준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희생자가 일반적이고 평범했으며, 그 수가 적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소재는 글 안에서 큰 역할을 하기에, 사용을 하며 깊은 생각을 해야 하지만 ‘추리’ 또는 ‘스릴러’는 살인사건을 기준점으로 삼아 이어지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거울문자> 역시 그런 종류의 소설이기에 죽음을 ‘강조점’으로 삼아 메시지를 던지면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 안에서 누구를 죽일(??) 수 있을까. 희생자의 캐릭터에는 거대한 권력가와 파렴치한 범죄자처럼 독자에게 살인에 대한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오히려 독자들의 분노를 살 만큼 지극히 평범한 이들도 있다. 수많은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안에서 다양한 유형의 희생자가 등장하지만, 희생자를 결정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희생자의 성격에 따라 ‘살인마’의 성격이 정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살인’은 ‘희생자’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발생한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독자가 뚜렷이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이 요소들을 흐리지 않는 이상 ‘희생자’에 대한 ‘이유’로 ‘살인마’의 성격이 결정된다. 독자들이 이입을 할 수 없는 죽음은 이 세 가지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유가 일관되지 않거나 희생자의 성격이 일관되지 않을 때 독자들은 이 소설에 궁금증을 갖는다. 이 역시 작가의 의도대로 이끌고 간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궁금증’은 때로 ‘호기심’이 아닌 ‘의아함’으로 바뀔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장살인마에게 적당한 희생자는 누구인가.
글쎄, 아름답게 꾸며도 추악해 보이는 이들이 아닐까. 심장을 꺼내도 무감할 정도의 인간들이 아닐까.
그 외의 간단한 것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파란약 작가의 문장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특별히 문체에 있어 수정할 것은 없다. 다만 ‘문장’에 있어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문장의 오류에 대한 부분이다.
읽는 데에 있어 약간의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오류는 독자들이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맞춤법을 100퍼센트 정확히 쓰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일정한 수준 이상을 넘는 문장의 잘못은 작가가 스스로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잘 고쳐주는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는 한글 시리즈가 있다. 또는 개인적으로 한글 맞춤법에 대한 공부를 약간만 해도 문장의 정확도가 훨씬 좋아질 수 있다. 이를 도울 수 있는 책 역시 시중에 다수 출간되어 있다. 맞춤법 검사를 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보다는 이렇게 문서작성 프로그램으로 간단한 검사를 하고 글을 올리는 것이 좋다. 독자들이 글을 보는 데에 신뢰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퀴어 소설이라는 작품의 분류는 매력적이다. 여성과 여성의 사랑, 특별히 ‘살인’이라는 으스스한 주제로 엮이는 감정의 연결선이 인상적이었다. 이토록 잔인하고 비밀스러운 사랑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퀴어’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종류의 다른 이야기들을 참고해서 ‘파란약’ 작가만의 퀴어 소설의 색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스케치와 같은 한 편의 시나리오를 읽은 기분이다.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처럼 이미지에 주목하여 쓴 글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이미지를 머리에 그리고 그 다음 이미지를 그려가는 형식으로 소설을 창작하면 훨씬 좋을 것 같다. 인물과 상황, 앞으로의 전개를 동영상처럼 머리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작가만의 색가 완결성을 가진 정교한 소설을 써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 작품이라는 것은 작가로서 떨리고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파란약 작가는 이를 꽤 성공적으로 완결 내었다. 그의 첫 소설 <거울문자>는 성공적인 첫발을 떼었다고 한 명의 독자로서 평하고 싶다. 장편과 추리, 미스터리에 대한 밀도 있는 이야기 구성, 독특한 캐릭터 설정에 강점을 가진 파란약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쓰다 보니 감상이 아닌 글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지만, 닳고 닳은 독자로서 부디 다음 작품을 보여주십사 하는 약간의 아부 섞인 말 정도로 가벼이 읽어주셨으면 한다. 첫 작품의 첫 리뷰를 쓰게 된 것에 혼자 방구석에서 대단히 의미를 부여하며 좋은 작가를 만난 것에 대해 한껏 기대감에 차 있다. (이렇게까지 기뻐하며 리뷰를 쓴 적이 또 있었나.) 그렇다고 다음 작품에 대해 부담을 가지지는 마시라.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첫걸음을 떼었으니.
파란약 작가가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창조할 또 다른 세계를 기대한다. <거울문자>라는 작품에서 시작되어 뻗어 나갈 다양한 글을 응원하며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