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디귿 작가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지상으로> 는 일단 글이 재미있고 속도감있는 이야기 전개 덕분에 연재 분량을 빠르게 읽게 됐어요. 현재 13회 분량이 연재중인데, 이야기가 전체 중 어디까지 진행된 것인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서 감상을 쓰기가 조심스럽네요. 하긴 뭐, 상황을 모르는 것이야 이 이야기 속의 <정>도 마찬가지죠.
지하벙커 <엠브리오>의 수명이 다해가면서, 오염된 지상 세계를 피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지상 세계에 안전한 장소가 있을지 탐사대를 보내요. 주요 인물은 탐사대에 포함된 두 명의 소녀 <노아>와 <정>, 엠브리오 고위층인 고장관의 아들 <마은>, 그리고 지상에서 생활중이던 소년 <주언> 등 16-18세 언저리의 ‘영 어덜트’ 네 명이에요. 이 인물들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돼요.
지상에 대해 꽤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노아와 달리 정은 <설국열차>를 세워서 꼬리칸부터 땅에 꽂아 넣은 느낌의 지하에서만 생활하다가 처음으로 미지의 지상 세계에 발을 들여요. 노아와 마은이 숨기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죠.
그래서, 주인공 네 명의 군상극이지만 독자들은 정에게 이입되는 면이 클 거예요. 정과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노아에게 의지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정은 노아의 의문스러운 행동을 다 보고 나서도 ‘어쩌면 이 일을 좋아하진 않았을지도 몰라’ 라며 독자들에게 위안되는 말을 해 주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아는 게 별로 없는 저는 스스로 이해를 돕기 위해 어느새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기존 영화 캐릭터들과 연결을 지으며 읽고 있었어요.
정 – 캣니스 <헝거 게임>
헝거 게임에 막 참여한 캣니스라고 해두죠. 정은 아직까진 캣니스만큼 전투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다른 아이를 대신해 탐사대에 합류하는 장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상되었어요. 정신력은 캣니스 못지 않을 거예요.
노아 – 일영 <차이나타운>
노아는 상당히 강하고, 거친 상황을 주도하는데, 왠지 비밀을 간직한 슬픈 눈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의 행동에 죄책감도 있고요. 복수의 칼날을 가슴 속에 품고 있죠.
마은 – 론 <해리 포터>
왠지 약간은 어리버리한 이런 이미지가 연상됐어요. 독한 엄마 밑에서 기를 못펴고, 선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노아를 오해하고 있죠.
주언 –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 연대기>
능력있고 긍정적인 인물이에요. 다른 셋에게 미지의 세계인 지상 출신이어서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역으로 도움도 받게 될 것 같아요.
(보너스) 고장관 – 메이슨 총리 <설국열차>
의뭉스럽고 괴팍한 고위 간부네요.
머리속으로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연재분을 다 읽고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해 하다가 작품소개의 한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원수를 찾아 지상을 헤매는 소녀.
사랑받기 위해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소년.
가족을 얻기 위해 동료를 배신해야 하는 소녀.
사랑하는 사람의 끔찍한 실체를 마주하게 된 소년.
순서대로 노아, 마은, 정, 주언 이겠죠? 지상 정착지 대표인 주언의 아빠에게 끔찍한 비밀이 있는 모양이에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네 소년소녀들의 성장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어둡고 단단한 비밀을 뚫고 희망의 싹을 틔우길 응원하고 있을게요.
사족을 붙이자면, 저 개인적으로는 곤충인간의 등장이 극의 현실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어요. 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약간 과한 설정인 느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