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말시티 작가님의 <정의의 일격> 은 오늘 집에 오는 길에 봤던 것 같은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해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읽다 보면 조금 심각해진다 싶다가 어느새 꽤나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게 돼요. 가까스로 해결된 엔딩 이후 주인공들이 살아갈 날들은 약간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기현이 중심을 잘 잡아줄 것 같아서 안도감을 주네요.
기현은 태희가 지하철 진상남의 뺨을 후려치는 장면을 목격해요. 그런데 주변의 누구도 그에 반응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태희가 일종의 초능력자란 걸 알아차리죠. 본인도 능력자였던 기현은 태희의 도움으로 <정의의 일격> 기술을 연마해서 회사 내의 소소한 정의들을 구현하게 돼요.
이 쯤에서 저는 의문을 갖게 돼요. 진상짓을 하는 사람을 – 다들 그러는 것 처럼 못 본 체 하는 대신 – 한 대 때려주고 별 문제 없이 현장을 벗어난다. 맞은 사람도 주변인도 나를 특별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과연 정의구현일까요? 맞은 사람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같은 짓을 또 할 것이 분명한데, 어쩌면 그저 후련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기현의 짐작이 맞다면, 맞은 사람이 기억은 못해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는 모양으로, 교화 효과가 있긴 한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이 <정의의 일격> 이라는 기술은 초능력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마술 쪽에 가까워요. 관객 모두가 커튼 뒤에 있던 미녀가 사라졌다고 믿으면 실제로 사라진 게 되잖아요. 나중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아주 잠깐은 놀라고 어리둥절하며 다른 차원으로 떠나버린 미녀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죠. <정의의 일격> 기술도 사람들이 눈 앞의 상황을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마술이에요.
‘능력자’ 역시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제 생각에 오히려 능력자는 이 기술이 먹히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마술을 믿지 않고 트릭을 파헤치는 사람들이죠. 마술사가 트릭을 연습하듯이, 이 소설의 능력자들도 자신에게 맞는 <일격> 스킬을 연마해야 해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마술사가 있는 반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트릭을 쓰는 사람도 있겠죠? <일격> 기술 역시 꼭 정의로울 필요가 없어요.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기술을 쓰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무리가 등장해요.
힘이 곧 정의라고 주장하는 악당들과의 대립 과정에서, 그리고 새로이 각성한 세영이 자신만의 정의 구현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기현은 절대적인 정의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세영에게는 세영의 정의가. 태희에게는 태희의 정의가 있다면. 내게도 나의 정의가 있다. 무엇이 옳을까. 정답은 없다.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 태희와 세영은 의기투합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현은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기로 해요. 그 방향이 인간적인 따뜻함을 향하고 있어서 안심하며 글 읽기를 마쳤어요.
이 소설이 저에게 날린 <일격>은 다음 부분이에요.
우린 어쩌면 매일 누군가에게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세상 어딘가에서 뻔히 벌어지는 이런 불의에 눈 감으며. 어쩔 수 없다며. 심지어 그게 자연스러운 세상의 섭리라며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모든 사람들이 불의의 트릭을 꿰뚫어 보고, 선의의 마술에 대한 믿음을 가져서, 각자의 품 속에서 평화의 비둘기를 꺼내 날릴 수 있는 날을 우리 함께 기다려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