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참신한 소설을 좋아해서 정디귿 작가의 <지상으로>를 읽어 보았다.
<지상으로>는 비록 기대했던 만큼 참신하진 않았지만(그 이유는 후술함) 읽는 재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군상극적 상황, 빠른 내용 전개는 마치 웹툰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읽는 동안 작품 전개상 오랫동안 숨겨놓는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고, 그 이야기를 독자 나름대로 추론하는 재미도 있었다.
정디귿 작가의 필력은 매력적이라, 작가가 숨겨놓은 이야기를 독자들이 자연스레 궁금해하게 만든다. <지상으로>를 읽으면서 나 또한 그 필력에 자발적으로 휘말려 이야기를 고속도로 달리듯 쭉쭉 읽어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점도 몇 가지 있어서 그걸 명시하고자 한다. 부디 작가가 나에게 악의가 없음을 인지하고, 나의 부족한 지적들을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길 바란다.
– 다소 정신없는 전개
‘리뷰 공모에 부쳐’에서 작가가 명시한 “쓰고나니 너무 정신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보면, 작가도 인지하고 있는 점 같지만 지적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은 인물의 시점에서 전개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상황의 다면성을 살필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다소 정신없어진다는 단점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노아’와 ‘정’ 두 사람의 시점에서만 이야기가 전개되었어도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 친절하지 않은 설명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오로지 인물들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30년 전 (작품 속) 세상이 멸망했다는 등의 배경 상황을 이해해 나가야 했다. 또한 9층, 7층 등과 장관/대표 등 여러 직책들 역시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마치 튀어나오듯이 등장하여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요소들이 나올 때 부연설명이 충분히 함께 나왔더라면 독자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쉬워졌을 것이다.
– 인물의 평면성, 어디서 본 것 같은 설정과 전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인간형(생존자, 오해를 받아서 위험에 빠져드는 아웃사이더, 높은 자리에 있는 부도덕한 인물 등)이었으며 그들의 성격도 입체적이라고 하기엔 힘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설정을 보면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세상이 멸망한 뒤 인간이 지하에서 살아간다는 설정은 <시티 오브 엠버>가 생각났고, 전개 속에서 인물 생존의 문제가 부각된다는 점은 <메이즈 러너> 및 <헝거 게임>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 점은 내가 보기에 이 작품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작가의 역량은 독자적인 설정을 짜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만큼 충분한데, 그 역량이 평면적인 인물들과 어디서 본 것 같은 설정 및 전개로 인해 다소 묻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필력과 이야기 전개 솜씨가 흡인력을 발휘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 작품이 단점을 감수하고라도 읽을 만 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점은 매우 큰 장점이다. 때문에 나는 작가의 무한한 발전을 응원하며, 정디귿 작가가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독자적인 작품을 창작해 내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