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목 → 흰 꽃을 피운다:오버 더 초이스 감상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오버 더 초이스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위래, 18년 6월, 조회 819

※”오버 더 초이스”와 “눈물을 마시는 새” 미리니름 주의

 

‘식물의 동물화’는 이미 작가(또는 타자)의 전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드러났던 바 있다. 피를 마시는 새로 이어지는 타자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용(龍)은 보기와 달리 식물로 태어나서 그것을 기르는 이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해서 자라게 된다. 식물이 동물처럼 살아움직인다는 것은 이영도 소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익숙한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의 사람화’는 어떨까.

그러니까, 인간화가 아닌 사람화 말이다. 이영도 소설에서 인간종이 아닌 오크나 엘프 또는, 도깨비와 나가 또는, 유니콘이나 야채 뱀파이어 같은 족속은 인간종과 구별되지만 여전히 인간과 같은 지능과 관습, 문화를 어느 정도 공유하며 대등한 관계로서 사람이라 묶여 불린다.

이영도 소설에서 등장하는 수 많은 종족들이 나오고, 특히나 “오버 더…” 연작에선 “드래곤 라자”나 “눈물을 마시는 새”보다도 더 많은 종족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외관은 인간과 닮게 생겼다고 묘사되나 생활 관습이 크게 다른 것부터(뱀파이어), 분명 현존하는 특별한 동물종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이는 종족도 있다(늑대인간).

특히나 ‘오버 더 초이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종족 ‘카닛’은 여러 대목에서 드러나는 묘사로 볼 때 분명 개과 동물의 습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둥이가 튀어나왔고 치악력이 세고 냄새를 잘 맡으며 네발 달리기에 익숙하다(개인적으로는 늑대인간과는 겹치므로 여우와 닮았으리라 상상했다). 아무튼 이러한 카닛의 등장은 타자가 동물의 사람화를 의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갈등 요소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타자의 전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선 식물의 동물화가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 작품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작품 내내 용은 상징적 존재로 등장하며, 주인공 륜의 용 ‘아스화리탈’은 작품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완전히 다른 성질의 모습으로 식물성과 동물성의 양면을 드러낸다.

동물의 사람화도 역시 갈등의 빌미가 된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애초에 종족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고, 후속작 “피를 마시는 새”는 그 조화가 쉽지 않음을 드러낸다. “오버 더…” 연작의 주인공 ‘티르 스트라이크’는 전직 검술교관으로 만약 인간만이 있는 세계관이었다면 자신의 전직업이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각 종족을 상대로 할 때마다 개개인이 전투 방법을 달리해야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버 더…” 연작의 세계관은 각 종족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 같지만, 늑대인간들은 여전히 두 개의 은팔찌를 차야한다. 그것은 내적 갈등일 때도 있다. 동물의 야성과 사람의 이성은 계속해서 대결을 벌이며, 인간 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식물의 동물화와 동물의 사람화를 넘어, 이제 타자가 문제시 삼는 것은 ‘식물의 사람화’다.

“오버 더 초이스”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모두 식물의 사람화에서 온다. 이는 본 작을 가로지르는 결정적인 갈등 욧소다. 작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식물의 사람화에 대해서 광기어린 집착(포인도트 부인)을 가지고 있거나 극도의 공포심(덴워드 이카드)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 티르 스트라이크는 작중 초반에 지성이 가진 식물을 ‘악마’나 다름없다고 믿기도 한다. 이것은 일견 터무니 없어보인다. 실제로 연재 도중 많은 독자들은 덴워드의 입으로 악마가 아닌 식물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나 또한 그랬다. 왜냐하면,

식물은 선하지 않은가?

식물은 생태계 가장 아래에서 무수한 자원을 인류에게 퍼주고 있다. 그것은 목재 그 자체나 목탄으로 열원이 되기도 하고, 곡물을 키우거나 산에서 채집한 나물로 먹기도 하며, 관상용은 물론이고 집을 짓거나 여러 집기를 만들 때 쓰인다. 심지어 책도 나무로 만든다. 오버 더 초이스는 발매 일주일만에 3만권이 팔렸다. 30년생 원목 한 그루에서 59kg의 종이가 나온다고하니, 707g인 오버 더 초이스는 83권이 나온다. 지금까지 360그루 가량이 벌목된 셈이다.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식물의 은혜를 입고 산다. (아니, ‘은혜’는 관용적으로 쓴 단어다. 밥이든 가구든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근거해 제값에 내 돈을 주고 사는 거니까 은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다들 교환되는 식물들 자체에 물적 가치가 크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타자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타자가 여러 인물들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의 요지는 이렇다. ‘식물은 저항할 수 없어 그냥 당해주고 있었던 것 뿐이다.’ 작품이 중반부에 이르면 식물은 식물왕을 근거로, 전작의 등장인물 지데를 사절로 보내 인간과 교섭하려고까지 한다. 주기만 하는 관계도, 받기만 하는 관계도 없는 것이다.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나무는 왜 키가 큰 걸까?’ 대목이었다. 타자의 뻔뻔한 등장인물들은 시대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각종 지식을 섭렵하고 있고, 진화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위해서 키를 키운다. 나무는 특별히 선량한 생물이 아니며, 다른 동물이나 사람과 같이 똑같이 생존 욕구로 가득 차 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식물을 매매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정작 식물들에겐 동의를 받은 적이 없다. 동물권은 점차 높아져 공장식 축산에 대한 비판과 채식주의자들을 등장시켰지만, 아직 식물권에 대한 목소리는 크지 않다. 식물은 무시받는 존재다.

허나 “오버 더 초이스”의 식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진 교섭권은, 식물들 자신에게는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선물이다. ‘부활’말이다. 이 굉장한 능력은 식물들이 인간과 대등하게, 또는 그보다더 우위에서 교섭할 수 있도록 만든다. 덴워드 이카드에 따르면 그것은 교섭 조차도 아니다. 식물왕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식물에게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오버 더…” 연작 속 식물들은 지구의 식물들과는 다른 것이 틀림없다. 아직 양분과 정보를 빨아들여 고스란히 모습을 되살리는 식물의 존재는 지구에서 사고로도 일어난적이 없다. 부활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하지만, 적어도 식물 때문이라고 한적은 없다. 하지만 식물이 부활, 회생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 크게 이상한 비약은 아니다. 식물은 재속에서 되살아나며, 꺾여도 가지를 올리고, 틀림 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싹을 틔운다. 특히나 식물은 고유한 개별적 특성으로 나뉘기 보다 하나의 집합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다. 겉보기만이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그런 경우가 있다. 몇 년 전 바나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내겐  바나나 하나의 종이 개별의 바나나이면서 모든 바나나인 것처럼 들렸다. (다행히 바나나는 멸종하지 않았다.) 작중 인물들은 식물이 단순히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를 부분적으로 역전시키는 것(나도 이 표현이 틀렸다는 걸 안다)’으로 표현한다. 나무뿌리가 어떻게 완전히 분해된 정보를 다시 정렬시킬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식물들이 가진 판타지적 속성은 팔찌를 벗으면 늑대인간이 되는 인간이 되는 것과 동격의 이야기다. 식물과 동물을 동등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말이다.

이런 식물의 동물화, 동물의 사람화, 식물의 사람화가 작중에선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암시되는 종족도 있다. ‘아니제이’ 종족이다. 이들은 욕정하는 대상으로 변신할 수 있고, 변신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할 수 있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오버 더 초이스의 식물들 중 적지 않은 아니제이가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은 식물이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지성을 가지고 사람을 되살리거나 사람으로 변신하더라도 욕정과는 관계가 없으니 이런 상상력은 근거가 빈약하긴 하다. 하지만 각 생물종의 경계를 허무는 아니베이라는 소설적 장치는 타자가 다루는 작품의 주제를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오버 더 초이스”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버 더 초이스”는 사람들만큼이나 중요한 식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영도의 실험적인 서술 안에서 그야말로 ‘식물적’으로 등장하며, 하나의 인물로 기능한다. 특히나 주요한 등장식물들은 마가목과 비누풀, 그리고 미루나무라고 볼 수 있겠다. 각각의 캐릭터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야말로 사람처럼 행동해 ‘식물의 사람화’를 작품의 표면으로 밀어내고 있다. 후반부에 들어서야 이들이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식물왕’ 선출을 위해서라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지성이라는 것은 모두의 기대대로 옳은 방향으로만 사용되지 않으며, 악한 일에도 사용된다. 종말을 바라는 미루나무가 션의 얼굴을 한 것은 당연하다. 식물은 사람의 지성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선택하는 능력’까지 얻게 된다. 바로 ‘자유의지’ 말이다. 분명 그 자유의지는 왕을 자신의 뜻으로 선출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밖의 용도로도 쓰인다.

어떤 선택은 파국을 부른다.

“오버 더 초이스”는 이전 연작 세 작품에 비해서도 어두우며, 타자 이영도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처절한 것처럼 보인다. 유머가 없지 않지만 쉽게 웃을 수 없으며, 입술을 깨물고 봐야하거나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 연속된다. 특히나 작품의 첫 페이지에서 나오는 서니(다섯도, 일곱도 아닌 여섯 살)의 죽음을 보고서,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역대 참사들의 순간을 겹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매몰된 생존자를 찾기 위한 소방관들의 모습과, 대구지하철 화재 속 벽면에 검댕 위로 살려달라고 쓴 글씨들, 세월호의 탑승자가 찍은 영상 속 들려오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 ‘닷새간 살아있었던’ 카닛 소녀를 구해내지 못한 자책으로 ‘시체를 꺼내는 엿새간’ 스스로를 내몰았던 티르 스트라이크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들에게 정말이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살릴 수 있으리란 희망,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이 주는 참담한 이 감정은 실질적인 무력감으로 말미암아 더 고통스럽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파국을 접하고 있으며, 텔레비젼과 스마트폰 액정, 모니터만큼이나 가깝게 느끼고 벗어날 수도 없다.

다행히도, 어떤 선택은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오버 더 초이스”에선 말이다.

제국에겐 식물왕에 대적할 ‘후후’와 ‘피피’가 있었으며, 최후의 사실이 밝혀진 이후엔 다음엔 전 지구의 동물과 사람을 파멸시킬 초화산을 막아줄 액받이 왕이 있었다. 진화론과 물리학을 넘어 인류학에도 소양을 갖춘 작중 인물들은 설명을 듣자마자 식물왕이 호부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물론 그것은 이름모를 그 식물의 극적인 희생은 아니다. 단지 생존을 위해 보다 타당한 경우의 수를 선택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버 더…” 연작의 세계관은 멸망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아무쓸모도 없다.

포인도트 부인은 그토록 서니를 되살리기 위해 식물왕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행동하지만, 그녀는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기억만을 남기게 된다. 스스로가 되살아났다고 믿은 지데=마가목은 그의 연인으로부터 내쳐지며, 마하단은 자신의 주인은 물론 진짜배기 션도 살리지 못한다. 애초에 티르가 굳게 믿던 악마가 식물왕이었다는 것부터 엉망진창이다. 심지어 선택 그 자체가 파국일 때도 있다. 황제의 혈통이면서 동시에 청소년인 덴워드 이카드(추정 나이 15세)는 미루나무의 꾀에 속아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을 부르게 되고 그 장면은 더 없이 거창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들은 티르 스트라이크의 선택으로 정말 볼품없게 퇴장한다. 타자는 연재 소설 내내 새로운 사실로 서사에 반전을 꿰하며 그 이전까지의 사고와 선택들을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 심지어 해서는 안되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식물의 사람화’는 각 나무들이 지데와 션, 서니와 같은 데스마스크로 등장한다. 티르는 자신이 죽여버린 것(또는 살릴 수 없었던 것)들과 마주하며 혼란을 느끼고 주저한다. 이 갈등의 단초는 바로 ‘비누풀’이 담당하고 있다. 작품의 첫 문장 ‘나는 티르 스트라이크다. 삼십여 년 전부터 티르 스트라이크 하고 있다.’를 통해 더 기술적으로 성공시키고 있다. “오버 더 초이스”의 중후반부에 이르면 티르 스트라이크는, 티르 스트라이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누풀은 티르 스트라이크가 응당 했어야 할 일들을 여전히 선택한다. 티르 스트라이크가 미루나무에게 얻어맞은 동안 비누풀은 티르 스트라이크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이다. 때문에 티르 스트라이크와 비누풀이 나누는 대화들은 사실상 내적 갈등을 완전히 표면으로 드러낸 결과에 가깝다. 진짜 식물로서의 대화는 티르와 비누풀의 마지막 대화 정도다.

비누풀은 서니를 위한 서니가 되었고, 마가목은 티르를 위한 지데가 되었으며, 미루나무는 티르를 위한 션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비누풀은 ‘티르 스트라이크를 위한’ 티르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사람이 된 식물들은 티르가 죽였던(또는 살리지 못했던) 이들이 된다. 티르가 바로 그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개인적인 욕망들을 타고났으나, 그 모든 것은 그저 ‘척’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최후의 최후까지 와서도 타자는 이야기를 뒤집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그저 인간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니까.

티르 스트라이크가 된 비누풀은, 바로 티르 스트라이크를 위해서 말한다. 이것은 모방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티르 스트라이크 자기 자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대사는 소설을 꿰뚫고 나와 독자의 가슴을 꿰뚫는다.

잊으라고.

그것이 서니 포인도트를 잊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것이 바로 너이자 나인 티르 스트라이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티르 또한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 말이다. 과거의 기억과 후회들, 실패한 선택들을 모두 이끌고 나아갈 수 없다. 간혹 그런 시도를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뒤늦게 자신이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주저앉기 마련이다. 덜어내야만 걸어갈 수 있다. 걸어가는 이들은, 그리고 이내 지평선을 넘어가는 이들은 모두 조금이지만 잊힌 이들이다. 티르 스트라이크 또한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티르 스트라이크의 마지막 답변은 이렇다.

“나 생각보다 자주 서니 이야기할 거 같다.”

잊겠지만, 기억하겠다. 모든 갈등을 넘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식물화’다. (아니제이를 통해 미리 정답을 꿰뚫어본 안셸의 지혜에 탄복을!) 사람이 된 식물의 요구에 맞서, 사람 티르 스트라이크는 식물의 답을 내놓는다. 식물은 잊지 않는다.

식물은 자신의 토양 안에 스러져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에너지 삼아 성장해나간다. 이를 사람에 대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사람은 슬픔과 상처를 양분으로 삼아 성숙한다. 우리에게 내닥치는 모든 파국을 그저 ‘잊으라’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이 파국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일들은 잊지 말아야한다. 어떤 일들은 받아들여야한다. 어떤 일들은 바로잡아야 한다. 죽음이 사라져 삶이 의미가 없어지더라도, 후후와 피피가 땅 아래 화염의 매듭을 지으려고 하더라도, 초화산이 폭발해 대부분의 생명이 멸절할 위기 앞에서도, 우리가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하는 것은 거듭해서 쌓아온 과거다. 현재의 선택은 우리가 해왔던 선택의 합인 것이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계속 되뇌이면서 나아가는 것, 우리는 그 수 밖에 없으니까. 선택은, 없으니까.

사람화된 비누풀 앞에서 티르 스트라이크는 그렇게 사람에게 내재된 식물성으로 맞받아친다. 그리곤 아직 잘못된 선택을 번복할 줄 모르는 이에게, 선택의 종결자 후후와 피피를 막기 위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달려가게 된다.

작품의 끝에서 의장 님의 새로운 재배 가구인 ‘케이토의 마가목’은 마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무가 되어버린 륜과 아스화리탈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오버 더 초이스”는 그 작품과는 10년이 넘는 격차가 있다. 륜과 아스화리탈은 영원한 태풍의 눈 안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게 된다. 하지만 케이토의 마가목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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