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효과로도 불리는 ‘제노비스 효과 (Genovese effect)’는 사건에 대한 목격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개인이느끼는 책임에 대한 부담이 적어져,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고 방관하게 된다는 심리현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제노비스 효과’라는 명칭은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사건’에서 비롯됐다. 뉴욕 퀸즈에 거주하던 키티 제노비스가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칼을 든 강간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38명의 살인 목격자 중 아무도 경찰을부르지 않았다 (Thirty-Eight Who Saw Murder Didn’t Call the Police.)”라는 헤드라인을 낸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따르면 제노비스는 세 차례나 칼에 찔렸다. 새벽 3시15분, 첫 비명을 들은 아파트 주민들은 지켜만 봤다. 목격자 중 누군가가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범인은 도망쳤다. 쓰러진 제노비스를 아무도 돕지 않자 범인은 돌아와 피해자를 또 찔렀다. 비명 소리에 아파트 창문들의 불이 켜지자 범인은 다시 도망갔다. 제노비스가 힘겹게 아파트 안쪽으로 기어가는 순간 범인은 또 다시 나타나 한번 더 찌르고 몹쓸 짓까지 저질렀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38명이었지만 누구도 피해자를 돕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제노비스는 이미 숨져 있었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사건의 실상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세 차례 폭행이 35분간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를구조하지 않은 현실에 ‘냉혹한 도시’, ‘사라진 시민정신’, ‘인간성의 소멸’ 등의 후속 보도가 잇따랐다. 보도에 따르면 범인이 사라졌을 때 38명의 목격자 중 어느 누구라도 그녀를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면 그녀는 살 수 있었다. 사건에 대한 보도의 파급효과가 커짐에 따라 ‘제노비스 신드롬 (방관자 효과)’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용어가 생겨났다. 제노비스 사건은 ‘다원적 무지 이론’과 함께 아직도 범죄심리학의 주요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제노비스 신드롬 (방관자 효과)’는 일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의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와줄 확률은 낮아지고,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는 의미를 담은 용어다. 이는 목격자가 많다보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도움을 주겠지 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인데,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가리켜 심리용어로 ‘책임분산’이라고 한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노비스 사건’은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단순히 개인의 성격적인 측면으로 해석하기보다 사회적 상황 요인을 고려해 해석해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노비스 사건에는 기막힌 반전이 숨어 있었다.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던 피해자의 남동생이 끈질긴 진실 추적 결과 당시 사건의 실제 목격자는 6명이었고 이중 2명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2007년에 밝혀낸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16년이 되어서야 오보를 인정하는 사과 기사를 냈다. 정작 당시 오보를 낸 당사자였던 사건 데스크는 연이어 제기되는 의혹을 부인한 채 편집국장·칼럼니스트 등으로 승승장구하다 오보가 완전히 드러나기 직전인 2006년 사망했다. 사건의 범인도 2016년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어쩌면 ‘제노비스 사건’의 진정한 시사점은 사회나 주변 상황 요인이 방관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방관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악을 창출해낸다는 것 아닐까? 애초에 38명의 방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 사건의 목격자는 38명이 아닌 6명이었고 이들 중 2명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거대언론들은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내고보도와 보도로 인한 파급효과에 대한 책임에 대해 외면했다. 당시 특종 욕심에 눈이 먼 기자는 확인되지 않은 경찰의 이야기를 기사화하였고, 사건 한달 후 경찰이 목격자는 6명이었다고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정정기사 조차 내지 않았다. 제노비스 사건의 방관자는 누구였을까?
임가비 작가의 <혐오스러운 방관자>를 읽으며 제목의 ‘혐오스러운’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에서 선미는 3번의 방관을 한다. 학창시절 왕따 피해자인 친구 ‘민수’를 외면했던 것, 성형외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진료 중 환자들을 성폭력의 제물로 삼았던 의사를 방관했던 것, 살인범의 사전 범행을 목격했음에도 눈감았던 것이 그것이다. 선미가 행한 3번의 방관에서 선미는 사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학창시절에는 ‘민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성형외과에서는 유일한 목격자는 아니지만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몇 안되는 목격자였고, 공익제보를 한 간호조무사에 의해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난 이후에도 자신의 일상에 피해를 준 공익제보자를 원망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마지막 사건에서도 절실하게 도움을 구하는 피해자를 외면하고 만다. 아마도 작가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닌 진실 앞에 눈을 감고 책임을 외면하는 ‘제노비스 사건’의 진정한 방관자를 염두에 두고 ‘혐오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을까?